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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미 Jun 27. 2018

[책] 백의 그림자_황정은 작가


백의 그림자_황정은 작가 


 사실 이 책을 사던 날은 책을 살 생각이 없었다. 그저 친구와 요즘 새로 정비되고 있는 세운상가 안에 생긴 카페를 들를 생각이었다. 차를 가지고 나왔는데 주차가 애매했던 탓에 우리가 변경한 행선지는 광화문 교보문고였다. 책을 사면 2시간 무료주차가 가능했고 어차피 책 사는 거야 내 즐거움 중에 하나이니 적당한 책 한 권을 구매하고 근처 카페에서 수다나 떨 계획이었다. 그렇게 내 손에 들어온 책이 황정은 작가의 <백의 그림자>였다.  


 우리는 광화문으로 향하기 전 세운상가 주변을 주차를 위해 몇 바퀴를 빙빙 돌았다. 여기저기 조명 가게며. 소방 관련 제품들을 취급하는 가게며, 미싱 가게들이 즐비했다. 저렇게 많은 가게들이 모여있는데 과연 장사가 되는 걸까 싶을 정도로 뺵빽하게 말이다. 그리고 꽤나 오랜 시간 그곳에 있어왔던 가게에서 인도까지 침범해가며 내놓은 오래전부터 저기 있었던 것 같은 제품들이 쉽게 눈에 띄었다. 가게 주인들은 가끔 우리가 기웃거리면 우리를 의식하기만 할 뿐, 물건을 살 생각이 없다는 것을 금방 눈치채고는 다시 그들의 세계로 빠져들어갔다. 누군가는 가게 옆 간이 테이블에서 장기를 두고, 누군가는 저 많은 물건들이 소진될 것 같지도 않은데 또 새로운 물건들로 가게를 채우고, 누군가는 가게 앞 의자에 앉아 담배를 뻑뻑 피워대기도 하면서…  종로와 광화문에 대한 인상은 넓게 뚫린 도로에, 여기저기 고급스러운 빌딩들이 즐비한 그야말로 비싼 땅이었는데 불과 10분 거리에 골목에는 이토록 진하고 고단해 보이는 삶의 터전이 있다는 것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백의 그림자>의 배경은 전자상가였다. 몇 개의 동으로 이루어진 전자상가는 이제 쇄락할 대로 쇄락하여 빈 건물이며, 낡은 채로 방치된 주인 없는 물건들이 복도를 채우고 있는 곳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게는 몇십 년 전부터 독립을 하고, 결혼을 하고, 그들의 자식들을 먹이고, 입히고, 키워냈던 정들고 오래된 가게가 있는 그저 일상의 공간이다. 그 공간을 지켜온 이들은 자신들이 특별히 불행하지도, 가난하지도, 어렵지도 않다. 그저 지금까지 해온 일을 반복하며, 삶을 살아갈 뿐이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그들에 비해 세상은, 이 상가 밖 세상은 너무나 빠른 속도로 그들을 잊어갔다. 마치 그들이 이 화려하고 깨끗한 도시에 오점인 것처럼 잊고 싶어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건물은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재개발지역으로 포함되었고 ‘가’ 동은 허물어져 공원이 조성되었다. ‘가’ 동에 남아있었던 몇몇의 사람들은 보상금을 가지고 그곳을 떠났고, 또 누군가는 끝까지 그곳에 머물다 쫓겨나기도 했다. 그들의 오랜 시간 삶이 쌓인 공간이 하루에 한층씩 소리도 없이 너무나 빠른 속도로 삭제되었다. 원래 이 곳에는 공원이 들어서야 마땅했던 것처럼 말이다.  


 …… 슬럼이라느니, 라는 말을 들으니 뭔가 억울해지는 거예요. 차라리 그냥 가난하다면 모를까, 슬럼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치 않은 듯해서 생각을 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라고 무재 씨는 말했다. 
언제고 밀어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지니까, 슬럼, 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 (p.114) 


 이곳에 있는 수많은 삶들 중에 작가는 몇몇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중 전구를 팔던 ‘오무사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특히 마음이 쓰인다. 전구를 하나 더 끼워서 파는 할아버지에게 왜 그러시냐는 물음에 혹시 하나가 고장 나서 먼 걸음 다시 할까 봐.라고 답하는 사람. 오무사는 그런 식으로 이곳에 오랫동안 존재했다. 철거 이야기가 들리고 홀연하게 사라졌다가 갑자기 어떤 골목에서 다시 나타났다 사라진 존재. 우리는 오래된 것들에 대해 너무 무례하고 폭력적이다.  


 그리고 이 곳에서 일하는 은교와 무재가 있다. 정확하지 않지만 확실한 서로에 대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은 이 오래된 역사를 지닌 건물처럼 딱히 말하지 않아도 서로에 대한 공감과 마음을 내어준다. 유별나게 사랑을 고백하지도 않았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머리 가마 모양에 관심을 가질 만큼 서로를 잘 알고 있다. 외로울 때 함께 있어주고 싶어 하고, 죽고 싶다고 말하면 그런 말 하지 말라고 말하고, 밤에 갑자기 테니스를 치고 싶으면 달려와서 만나는 사람들. 이야기의 시작에서는 두 사람이 길을 잃었지만 이야기의 끝부분에서 또 한 번 길을 잃은 두 사람은 아마 더 이상 길을 잃지 않겠지.  


 이 이야기에서 특이했던 점은 ‘그림자’라는 존재였다. 황정은 작가의 다른 소설에서도 환상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포함되어었었는데 이번 소설 역시 그랬다. 물론 책 뒤에 신형철 평론가의 이러저러한 해석이 있었지만 나에겐 그녀의 환상이 이렇게 읽혔다. 이야기를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 나는 의문점이 하나 있었다. 왜 그림자가 일어나고 가끔은 나를 떠나기도 하는 이상한 상황에서 주인공들은 동요하지 않을 것일까? 소설에서 그림자가 일어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삶의 저 마지노선까지 밀려갔다 온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다. 귀한 것을 잃었거나, 죽을 만큼 힘들었거나, 삶의 의지가 없거나, 누군가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앗아갔거나 하는… 아마도 마치 그들에게 부여되어버린, 선택할 수 없이 주어져버린 이상하리만큼 숱한 불우한 환경들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이상한 사실. 인간은 마땅히 인간답게 살 수 있어야 하고, 행복할 테지만 그것을 선택할 수 없다는 당연하지 않은 사회에서 당연하게 사는 것 역시 그림자가 일어나는 일만큼 당연하지 않지만 당연한 일이 아닐까? 그림자가 일어나더라도 살아가라 수밖에 없다는 사살이. 그들이 처해있는 환경과 비슷하고, 이때까지 그저 살아낸 그들. 그 사람들은 그렇게 그림자가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이를테면 뒷집에 혼자 사는 할머니가 종이 박스를 줍는 일로 먹고산다는 것이 애초부터 자연스러운 일일까,  
하고. 무재 씨가 말했다.  
살다가 그러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오로지 개인의 사정인 걸까, 하고 말이에요. 너무 숱한 것일 뿐. 그게 그다지 자연스럽지 않은 일이었다고 하면, 본래 허망하다고 하는 것보다 더욱 허망한 일이 아니었을까, 하고요. (p.144) 

 

 나는 ‘폭력’이라는 것이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정해져 있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행복할 권리가 있지만 행복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의 개인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 이 사회가 나빴기 때문에… 그들을 그렇게 만들어버린 것은 아닐까?  


 아, 그리고 나는 이 책에 부치는 글을 쓴 신형철 평론가를 굉장히 좋아한다. 처음 소설을 읽기 시작했을 때 ‘어? 이게 끝이야?’ 라던가, 마지막 책장까지 넘기고서도 ‘이게 무슨 내용이지?’라는 의문점을 가지던 시절. 신형철 평론가가 쓴 영화에 관련된 책이라던가 고전 읽기에 관련된 책, 그리고 잠시 그가 진행했던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책을 읽어내는 방법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내 분야인 공연에 관해서도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고, 세상을 대하는 나의 삶의 태도에 관해서도 많이 배웠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서 공연계에는 부재한 좋은 평론에 대해 질투가 느껴지기도 했다. 이런 좋은 평론가들이 어떤 작품의 의미를 또다시 찾아주고, 만들어주는군 하는 생각에 말이다. 그가 이 책의 부치는 글을 썼다는 것을 책을 다 읽고서야 알았다. 책이 주었던 여운도 강렬했는데 신형철 평론가의 글도 있다는 것에 두배로 행복했다. 역시나. 역시나. 그의 글도 엄청났다.  


 여러모로 행복한 소설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마음 한편이 참 쓸쓸해졌다. 내가 돌아다녔던 세운상가의 초여름의 풍경이 자꾸만 이야기와 겹쳐 보여서 (실제로 황정은 작가의 아버지가 세운상가에서 음향기기 고치는 일을 하셨다고 한다.) 어떤 작품 하나를 마무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게다가 그 작품이 무거운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면 이 작가는 이 소설을 쓰는 긴 시간 동안 어떤 터널을 통과해 왔던 걸까? 황정은 작가의 소설을 볼 때마다 그 여정이 쉽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이번 작품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사라져 가는 것들에서 애정 어린 작가의 시선이 네가 거기 있었던 걸 기억할게…라고 이 책이 말해주는 것 같아서 조금 안도가 되기도 했다. 한 장 한 장 책장이 줄어가는 게 아쉬웠던 책. 작가의 말대로 조금 따뜻한 것을 동원하고 싶은 마음으로 많은 독자들도 이 책을 읽어주고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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