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벌써 포기할 수 없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가 쓰는 말들이 그 포기할 수 없는 것과 늘 새롭게 관계를 맺기에, 그의 시는 이 모욕 속에서, 이 비루함 속에서 이렇게밖에 살 수 없다고 생각하려던 사람들을 다시 고쳐 생각하게 한다.
- 황현산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난다 출판사)> '30만 원으로 사는 사람' 중에서 -
엄마는 늘 이렇게 말했다. “시내 나가서 쇼핑하기 전에 제일 먼저 서점 들러서 책을 사주면 종일 조용히 따라다녔다. 너.” 어렴풋하게 기억하기로 그 서점은 부산 중구 남포동의 지하상가에 위치에 있던 작은 서점이었고, 엄마가 사줬다고 하는 책은 낭독 테이프가 딸린 그림 동화책 두 권이었다. 두 권이 한 세트였고, 책과 테이프가 딱딱한 플라스틱으로 포장이 되어 있었다. 우리 집은 그리 넉넉한 집이 아니어서 한 달에 한 번 책을 가질 수 있었고, 나는 그 책을 한 달 내내 달달 외우고, 테이프를 늘어질 때까지 들었다. 당시 우리 집 카세트는 오토리버스 기능이 없었던 건지 테이프 한 면이 끝나면 엄마를 깨워 뒤를 틀어달라고 했었다. 그러면 세 식구가 나란히 누운 캄캄한 밤의 단칸방은 어느새 숲이 되었다가, 성이 되었다가, 중세의 마을이 되기도 했었다. 그렇게 나는 학교를 들어가기 전에 동화 전집과 어린이용으로 간추려져 나온 고전을 섭렵했다. 그때부터 나는 ‘이야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초등학교 시절에는 아파트 단지 아래 위치한 작은 서점 글벗도서에 문제집보다 책을 사러 드나들어서 서점 주인께서 날 유별난 애로 기억할 정도였다. 내 용돈의 반은 다 책값이었다.
너무 은은하게 일상에 스며들어있었던 일이어서 나는 그것이 내 꿈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야기만큼 좋아하는 다른 것도 있었다. 음악이었다. 음악은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에 새롭게 시작한 무엇이었기 때문에 나 스스로 ‘좋아하는 것’이란 이런 것이란 걸 의식했던 것 같다. 그렇게 내 꿈은 쭉 음악과 관련되어 있었다. 피아니스트. 바이올리니스트. 유명 오케스트라 단원이 되어 전 세계를 떠돌며 연주하는 것. 대중음악 작곡가. 뮤지컬 음악감독…. 그렇게 나는 반수까지 해가며 작곡과에 입학했다. 그런데 어느 날 처음으로 내 글을 세상에 내놓을 일이 생겼다. 학교 뮤지컬에서 대본을 쓰게 된 것이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음악에서 글이란 걸로 급격하게 커브를 튼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당시의 나에게는 특별하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때도 난 늘 읽고 쓰고 있었다. 온갖 책을 부담스러울 정도로 읽고 늘 일기를 쓰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지금 생각해 보니 꿈이 변하는 중에도 읽고 쓰는 것은 변함없이 계속하고 있었다.
이후 뮤지컬 워크숍을 거쳐 대학원에 입학하며 글쓰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음악인’에서 ‘글 쓰는 사람’ 둘 중 어느 곳에도 제대로 속해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둘 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둘 중 무엇 하나 완벽하지 못한 사람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겐 늘 그러한 목마름이 있었다. 일단 뮤지컬로 글쓰기를 시작한 나는 뮤지컬 장르를 기웃거렸지만 생짜 신인에게 기회가 올 리 만무했다. 그래서 난 음악의 힘을 빌렸다. 내 첫 뮤지컬 작품은 동물원과 김광석의 음악으로 만든 주크박스 뮤지컬 <그 여름, 동물원>이 되었다.
작품을 올리면 다음이 있을 거라 믿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첫 뮤지컬이 재연. 삼연을 거칠 정도로 잘 되었지만 날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 새 나는 몇 개의 직장을 거치면서 생계를 이어 나갔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글 쓰는 일’을 기웃거렸다. 그렇게 나는 글을 쓸 수 있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이것저것 도전했다. 뮤지컬 팟캐스트용 45분 음악극 2편. 서울시향과 함께했던 음악극장. 창작오페라의 공동 대본. 연극 몇 편. 그 외 꽤 많은 행사 스크립트들. 그리고 가끔 기획도 했다. 그러면서 나는 이런저런 장르의 글을 다양하게 경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2023년 올해에는 또 한 번의 새로운 장르 개척의 장을 열었다. 소설. 내가 소설가라니. 이것저것 하다 하다 책을 내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을 못 했는데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구나 싶었다. 나에게 ‘책’이란 내가 처음 사랑했던 글의 형태였기 때문에 내가 감히 책을 낼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만약 내게 된다면 내가 올렸던 공연의 희곡집 정도는 낼 수는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나한테 소설을 쓰라니…. 처음 소설 제의가 왔을 때 출판사에 몇 번이고 확인했다. 제가 어떤 장르에서 글을 쓰는지 알고 연락하신 거 맞냐고. 출판사에서는 틀림없이 확인했고, 소설이 맞다고 다시 한번 말씀해 주셨다. 너무 송구스럽고, 부담스럽고, 걱정되었지만 내 마음을 흔들었던 대표님의 한마디가 있었다. “공연은 배우 예술이지만 책은 전적으로 작가가 주인공입니다.”
내가 주인공이 되는 과정은 너무나 힘들었다. 내가 싸울 전쟁터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데 일단 창이랑 칼을 들고 전장에 뛰어든 기분으로 집필 기간을 살았다. 그 어떤 장르의 글을 쓸 때보다 누군가의 방해 없이 나로 존재할 수 있었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는 시간이 되었고, 내가 어떤 글을 쓸 수 있고, 어떤 글은 힘들어한다는 걸 알았다. 대본을 쓰던 버릇이 배 있어서 문장이 자꾸 지문같이 써져서 속상했던 순간도 있었고, 대사 쓰는 건 재밌는데 좋은 문장을 쓰는 게 어려웠던 고비도 있었으며, 이 길이 맞는지 헷갈리는데 그 모든 걸 1 고가 쓰이기 전까지는 오직 나 혼자 결정해야 하는 것이 어렵기도 했다. 하지만 나에겐 편집자님이란 든든한 선생님이 있었고 그 덕에 일단 전투를 잘 치러낼 수 있었던 것 같다.
다음 주면 내 책을 전국 각지 서점에서 만날 수 있다. 무대에서 휘발되어 버리는 공연과는 다르게 내가 애쓴 200쪽 남짓의 종이가 누군가의 공간에 물성을 가진 책으로 존재하게 된다니. 이건 참 이상한 감각이다. 어쨌든 다음 주면 나는 뮤지컬 작가. 연극 작가. 음악극작가. 스크립터 작가에 이어 공식적인 소설가가 된다. 장편 소설 <디어 마이 라이카>의 작가가….
서두에 인용한 황현산 선생님의 글을 자주 생각한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일로 먹고살기 어려워도 돈보다 중요한 걸 이미 봐 버린 나는 그것들을 쉬이 포기할 수 없다. 그 가치를 저버리고는 내가 되고 싶은 나는 될 수가 없고,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살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나는 돈도 안 되는 이 일을 버리지 못한다. 앞으로 오랫동안 그럴 것이다.
여전히 한 장르에 정착하지 못하고 잡가로 존재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이쯤 되면 이것도 자랑인 것 같다. 그래서 이왕이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도 작가계의 (많은 장르를 넘나드는) 조승우 님이 되고 싶다.’
이제 내 꿈은 잡가인 동시에 작가가 되는 것이 되었다. 그렇게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