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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덕골 이선생 Dec 13. 2023

신은 내 안에 있다

나홍진의 <곡성(哭聲)>

 

                                                            [ 출처: 네이버 ]


의심과 믿음의 경계에서   


나홍진 감독은 <곡성(哭聲)>을 계기로 스타감독 대열에 합류했다. 상영 당시 장르영화의 부흥과 유럽 시장 진출, 칸영화제 초청이라는 쾌거를 달성한 바 있다. 감독은 영화 제작을 위해 3년간 네팔, 일본 등의 수많은 종교인을 만나 소통했고, 2016년 논란의 중심에 선 <곡성(哭聲)>을 탄생시켰다.


영화는 매순간 의심과 믿음의 경계를 오락가락 하며 관객들을 혼돈에 빠뜨린다. ‘선인가, 악인가’, ‘사람인가, 귀신인가’, ‘살아있나, 죽었나’, ‘피해자인가, 가해자인가’에 대한 고민이 그것이다. 이는 대로 믿기에 의심의 여지가 많고, 그 반대의 입장에 서기엔 어딘가 불안하다. 관객들은 감독이 던진 미끼에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그로테스크한 화면에 몰입한 나는 156분에 육박하는 러닝 타임을 버텨내면서, 복잡한 서사구조를 따라가기에 급급했다. 그럼에도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는 극의 흐름, 낯섦과 익숙함의 오묘한 줄다리기가 놀라웠다.


영화 전반부는 마을에서 벌어지는 살상을 그렸고, 후반부는 딸을 살리기 위한 종구의 처절한 몸부림을 담았다. 관객들의 최고 관심사는 외지인(쿠니무라 준)-일광(황정민)-무명(천우희)의 관계다. 서사 구조로 보아 외지인과 일광은 악인, 무명은 선인으로 대치되는 듯 보인다. 그럼에도 관객들은 혼란과 의문에 휩싸인다. 과연 외지인은 메시아 놀이를 하는 악마인가, 악의 탈을 쓴 메시아인가. 선과 악으로 구분 짓기에 의심의 여지가 많다. 구원자로 온 일광은 어떤가. 정을 맞아 괴로워하는 것은 외지인만이 아니다. 효진에게 벌어지는 알 수 없는 현상들은 일광을 더욱 의심하게 만든다.



그들은 놀라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유령을 보고 있는 줄로 생각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다."

                                                                                                         -  <곡성(哭聲)> 자막 부분 -



인간 본성에 대한 처절한 고찰     


우리는 대부분의 문제를 법의 테두리 안에서 해결한다. 그러나 이유 없는 피해자가 도출되는 상황이라면 어떤가. 가족과 이웃병들고 사라진다면, 누구에게 죄를 물을 것인가. 마음의 분노를 해결해 줄 누군를 찾기 마련이다. 내면의 안을 가시화함으로써,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대상으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억압된 분노를 현실 속 대상에게 표출하면서, 내면의 불안을 해소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을 사람들은 낯선 인물인 외지인을 가해자로 지목한다. 왜곡된 소문을 사실인냥 동조하며, 그를 악인으로 인식한다. 동네 사람들은 ‘독버섯의 원인으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라는 신문 기사에  주목하지 않는다. 그저 외지인의 정체를 밝히는 데 집중할 뿐이다.


영화 주인공은 사회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법을 따르는 경찰, 하느님의 뜻을 전파하는 신부, 신과 인간의 중간자인 무속인. 선과 악을 판단해야 할 그들조차 혼란과 갈등으로 힘겨워 보인다. 무명의 존재를 의심하는 종구, 악의 형상인 외지인을 대면하는 신부. 어느 누구도 온전히 선한, 온전히 악한 존재로 구분될 수 없기에, 갈팡지팡 운전하는 종구처럼 선택의 기로에서 방황한다.


모든 해결점은 신으로 귀결된다. 사람들은 비극적인 상황을 해결해줄 누군가를 찾는다. 악의 존재를 밝히기 위해 일광이란 자를 부르지만, 그조차 악귀과 선신을 구분하지 못한다. 거대한 악의 기운을 신으로 착각하고 받드는 어리석인 인물일 뿐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선과 악의 실체를 찾지만 정확히 양분될 수 없다. 선악은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된다. 우리 안에 선악의 마음이 혼재되어 있으니, 매순간 갈등하며 수밖에 없다. 그러니 미끼를 던진 것도, 미끼를 문 것도 나 자신이다.  

  

모든 것은 인간의 무지에서 비롯된다. 그런 의미에서 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거나, 그 실체에 매달리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모든 신은 내 마음에 있다. 자신의 마음 안에서 하느님을 찾고, 부처님과 만나야 한다. 안에 빛을 찾는다면 창조적 에너지로 발현할 수 있다. 선한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 마음의 안정도, 이웃간의 평화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현대 사회의 부조리한 잔상     


상영 당시 상당수가 어렵고 복잡하다는 평가가 많았다. 이러한 부분은 관객의 80%는 보이는 대로 이해했을 것이라는 감독의 우려와 일치하는 부분이다. 그것은 많은 관객들이 서사 구조에 포인트를 맞췄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는 대사나 이미지의 변곡에 따라 주제가 달라진다. 이미지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작품의 색깔도 달리 보인다.


<곡성>은 다양한 측면에서 해석될 여지가 많다. 영화에서 물질만능주의의 병폐로 생겨나는 병리적인 군상을 볼 수 있다. 먼저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대상으로부터 안식처를 빼앗긴 채 사랑하는 이들을 희생시킨다. 반면에 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그 탐욕자는 허망한 죽음을 관조하며 즐긴다. 자신의 탐욕을 위해 사회적 약자를 이용하고 병들게 한다. 서서히 무너져 가는 사람들을 쾌락의 수단으로 삼는 자들이 우리 사회에도 있지 않는가.


우리 주변에도 탐욕을 위해 힘없는 군상들을 병들게 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좀비로 변한 사람들은 타인을 공격하는 잔인한 존재로 바뀐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마약 사건을 대입해 보면 어떨까. 탐욕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미끼를 던지고, 미끼에 걸려든 사람들은 서서히 공격과 파괴적인 양상을 띈 채 괴물로 변한다. 결국 그것이 낚시를 위한 미끼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즈음, 그들은 가해자 없는 피해자로 남게 된다. 이웃과 가족을 공격해야만 사는 비극적인 운명을 수용할 수밖에 없고, 구원의 손길조차 잡지 못한 채 서서히 죽어간다.



무엇이 중한디? 영화는 우리에게 묻고 또 묻는다. 의심은 인간이 가진 최고의 도구이다. 용기 있는 단 한 사람의 발걸음이 세상의 큰 도약이 된다. 진실을 들여다보는 대범함을 가진 자가 많아질 때 우리 사회는 점점 더 나아진다. 그렇기에 원인 모를 희생자들이 속출하고, 양의 탈을 쓴 악마가 세상을 잠식할 때, 우리는 용기를  가진 ‘진실 사냥꾼’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의심은 이성적 판단 아래 이루어져야 하고, 선한 방식으로 행해져야 한다. 무엇보다 내 안의 선한 본성과 만나야 한다. 악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용기만이 나를 깨우고 세상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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