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모든 선의가 행복으로 끝을 맺지는 않는다.
진료 마감을 30분 남겨 놓고 한 중년 여성이 병원 문을 두드렸다. HPV 백신을 맞고 싶단다. 사실 HPV 백신은 만 45세까지가 FDA에서 허가한 나이이지만 요즘 100세 시대이기도 하고 자궁경부암의 발병은 biphasic으로 60~70대에서도 또 한번 발생하며 중년에서도 요즘은 활발하게 성생활을 하는 터라 자발적으로 맞겠다는 사람들을 굳이 말리지는 않는다.
진료실로 들어온 그녀를 H라고 하겠다. H는 약간 상기된 표정이었다.
"가다실9이 성병을 예방한다고 들었어요. 이거 맞으면 다른 성병들도 다 예방되는 거죠?"
아이고, 이 분 뭔가 단단히 잘못 알고 계시는 것 같은데. HPV 백신은 HPV(물론 이 바이러스도 성병의 일종이긴 하니, 틀린 말은 아니네)을 예방해주고 그 외 다른 성병의 예방 효과는 전혀 없다. 나는 H에게 잘못된 부분을 짚어주고 바로 잡아 주었다. 그녀의 얼굴에 실망스러움이 비쳤다.
"그래도 맞기로 하신 건 잘 하신것 같아요. 다른 불편하신 부분은 없으세요?"
그녀는 질 쪽의 염증이 없는지, 다른 문제가 없는지 미리 확인을 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 '미리'라는 말이 왠지 거슬렸다. 보통은 환자들은 문제가 생겨서 오지, 이런 표현을 하지 않으니까. 염증 검사를 좀 해보자고 했고, 상재균에 의한 질염이 나올 수도 있으니 확인을 해보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진찰을 하면서 역시나, 폐경이 된 여성에서 보이는 위축성 질염이 관찰되었다. 아무래도 성관계를 할 때 많이 아플 것 같은데...
"질 위축증이 있으신데요, 저희 병원에서 하는 치료를 오늘 하루라도 잠시 받아보시는 것이 좋으실 것 같아요."
H는 허락했고 나는 처치를 하면서 말을 청산 유수처럼 이어 나갔다.
"폐경이 되어도 여자들은 꾸준히 관리를 해야 해요. 우리는 에스트로겐이 더 이상 폐경을 겪으면서 나오지 않거든요. 그러면 이런 질 위축증, 질 건조증이 생기게 되고, 성관계시 불편함 때문에 성관계 자체를 피하게 되요. 그런데 남자들은 우리 여성들이랑 완전히 다르거든요. 남자는 사랑하는 여성에겐 어떻게든 섹스를 통해서 안정감과 위안, 자존감을 인정받고 싶어해요. 그들에게는 섹스란 타협할 수 없는 부분이죠."
이렇게 이야기 해놓고 나는 속으로 와우, 나 정말 말 잘 하는데? 대단한 철학 아니냐. 남자를 왜이리 잘 알지? 대단하다. 라고 자화자찬하면서 H를 바라보았다. 그 이후 그녀가 나를 우러러 보는 표정을 지을 것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녀의 표정은 차갑게 굳어져 갔다. 뭔가 잘못되었다.
"저는 섹스리스 된지 15년, 아니 20년 된것 같아요. 저희는 반대인데... "
응? 무슨 말씀이죠?
"저희는 남편이 그 동안 섹스를 거부했어요. 그렇다면 선생님 말씀은, 남편은 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겠군요."
뜨앗!
갑자기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켜버렸다. 이런 경우는 거의 드문 케이스였는데. 갑자기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하나 머리가 팽팽 돌아가야 했는데 오히려 멈춰버린 기분이었다. 점점 새하얘지는 머릿 속과 그녀의 싸늘한 표정과 10초 가량의 정적...
"뭐든 저는 환자분을 어떻게든 도와드릴 거에요! 지금 질 건조증도 다 해결해 드릴 수 있고요. 저희 병원 케이스는.... 불라 불라..."
망했다.
라뽀가 깨지는 소리가 머릿 속에서 울리는 듯했다. 빠지직.... 유리가 깨지는 소리 같았다. 가슴이 아팠다. 내가 대체 무슨 소릴 한 건지. 정말 헛소리를 주구장창 거창하게 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나의 추운 겨울 어느 날, 마지막 진료는 그렇게 끝이 났다. H는 공손히 인사한 후에 진료실을 떠났고 직원들에게 틱틱대며 병원을 나갔다고 들었다. 그녀가 다시 찾아올지 모르겠다. 다시 찾아오지 않아도 괜찮으니, 그녀의 마음에 내가 생채기를 내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란다. 한 번 엇나간 말은 가시와도 같음을, 칼바람과 같은 겨울 바람과 함께 절절히 깨닫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