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슐러 K. 르 귄의 『어둠의 왼손』
SF와 성性을 연관지어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소설이라면 어슐러 K. 르 귄의 『어둠의 왼손』일 것이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게센 행성에 사는 존재들은 고정된 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평소에는 남녀양성을 모두 가진 채로 있다가 발정기인 케머Kemmer 기간이 되면 남자와 여자 중 한쪽으로 변해 성관계를 갖는다. 케머가 끝나면 다시 양성으로 돌아오지만 다음 번 케머에는 이전의 케머와는 달리 다른 성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한 게센인은 어머니가 될 수도, 아버지가 될 수도 있다.
케머 시기는 여성의 가임기간을 연상시킨다. 지구에서 이곳으로 처음 파견된 여성 조사원의 보고에 따르면, 이들은 한달 중 5분의 4 정도는 소머Sommer 상태로서 전혀 성욕을 느끼지 않다가 나머지 5분의 1 기간 동안 캐머 상태로 강렬한 성적 충동을 느끼고 그 기간 동안 상대에 따라서 중성이 아니라 양성의 잠재력을 모두 보유하고 있는 형태이다. 그들의 눈으로 볼 때 항상 캐머상태가 가능한 인간은 성 도착적 존재이다.
르 귄은 이러한 설정을 통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뿌리박힌 젠더 개념을 파헤치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한다.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듯 그는 이 소설에서 “사고의 실험thought-experiment”을 시도하며 “우리에게 젠더를 제거했을 때 무엇이 남겨지는지”를 상상으로 실험해본다.
유엔을 연상시키는 에큐먼Ekumen의 친선대사로서 지구에서 이 행성으로 파견된 남자 주인공 겐리 아이가 가장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바로 여성 남성을 모두 한 몸에 지닌 게센인들의 특징이다. 처음에 아이는 양성을 모두 보유한 게센인에 대한 편견을 전혀 극복하지 못하며 길 안내자 역할의 에르트라벤과 의사소통의 철저한 부재를 드러낸다. 자신의 제한된 인간 남성의 시각에서 게센인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의사소통 능력을 갖지 못하던 아이가 어떻게 에스트라벤이란 게센인을 통해 차이를 받아들이고 에스트라벤의 여성성 뿐 아니라 자신 안의 여성성과 직면하게 되는 혜안을 얻게 되는지가 소설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르 귄은 전쟁을 남성들만의 행위로, “거대한 강간”으로 정의하며, 전쟁이 없는 사회를 상상하면서 양성 사회를 떠올리게 되었다고 했다. 성의 차이가 없으므로 어머니와 아버지의 구분도 없고 오이디푸스 신화도 존재하지 않는 겨울 행성, 이 곳은 전쟁과 강간, 즉 착취가 없다는 점에서 유토피아적인 성격을 지니지만, 르 귄이 그리는 게센의 양성 사회가 결코 문명이 없는 유토피아만은 아니다. 일명 겨울나라로 불리는 이 곳은 지구에서 온 겐리 아이에게는 수동적이고 여성적이며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비합리성의 세계로 느껴진다.
그러나 게센에는 그 무엇도 전쟁으로 이끌지는 못했다. 분쟁, 살인, 반목, 약탈, 복수, 암살, 고문, 그리고 적대감 등이 그들의 주요 메뉴이기는 했지만 군대를 동원할 능력이 없어보였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남성이나 개미처럼 행동하지 않고 동물처럼, 여성처럼 행동했다.
르 귄 『어둠의 왼손』 중에서
르 귄이 그리고 있는 게센은 사실 평화로운 유토피아라고 보기는 어렵다. 추위와 싸우느라 대부분의 에너지를 소진하고, 소소한 갈등과 분쟁이 끊이지 않지만 대규모 전쟁을 일으킬 조직력은 없는 세계, 그럼에도 이 세계에 속한 에스트라벤이 아이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봄으로써 사랑과 희생에 더 큰 능력을 발휘하는 과정을 통해 양성 사회가 적어도 지구의 이분법적 성 구조보다 더 수용적이고 자유로움을 에둘러 비추고 있다. [1]
버지니아 울프가 『올란도Orlando』에서 양성성을 여성의 해방을 위한 전제처럼 그리듯이 르 귄 외에도 적지 않은 페미니스트들이 양성성을 가부장제가 부여한 성정체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대안으로 삼는다. 그러나 과연 양성성이 유토피아적인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주웰 파커 로드Jewell Parker Rhodes는 오히려 남성, 여성, 각각으로만은 온전하지 못함을 강조함으로써 양성성은 남녀의 결합을 이상화하고 결국 결혼제도처럼 여성을 억합하는 아이러니이자 속임수일 뿐임을 강조한다. 또한 르 귄이 그리고 있는 게센 행성의 양성적 존재는 독자에게 양성이 아닌 남성으로 느껴지며 케머 상태에만 갑자기 여성이 필요해지는 존재라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2]
르 귄이 그린 게센 행성의 양성적 존재들이 정말 양성적으로 묘사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비평이 우세한데, 조애나 루스 역시 이 책에 여성은 없다고 논평한다. 르 귄은 이러한 비판에 대해 에스트라벤을 여성이 아닌 남성으로 보게 되는데에 책의 진정한 결함이 있음을 시인하면서 그 원인을 남성인칭 대명사의 사용에서 찾았다. 게센 행성의 두 나라인 카하이드와 오르고린, 그리고 각각의 종교인 한다라와 요메시, 또 케머와 소머 같이 낯선 단어를 만들낸 것처럼 양성적인 존재를 지칭하는 새로운 단어를 찾았다면 더 설득력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르 귄의 이 작품은 남성과 여성의 구분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혼란의 감정을 선사하는데 일조했다. “왕이 임신했다”와 같은 구절은 기존의 성 구분을 흐트러뜨리는 신선한 충격이며, 에스트라벤은 SF 문학에서 보기 드물게 복합적인 성격과 크기를 지닌 인물로 그려져 있다. 에스트라벤이 그He로 지칭되기는 하지만 행동과 사유 모두 여성성과 남성성을 복합적으로 보유한 인물로 묘사된다. 여성성의 신화가 페미니스트들이 거부하는 젠더의 전형을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위험도 없지 않으나, 양성적 존재에 대한 상상은 젠더에 의해 얼마나 많은 것이 결정되고 파생되는지를 상대적으로 보여주는 효과를 갖는다. 르귄이 상상한 양성 사회는 개인적으로 한 쪽의 강요로 이루어지는 강간이 불가능하고 따라서 거대한 강간이라 할 수 있는 대규모 전쟁과 착취도 일어나지 않는다. 르 귄이 펼쳐놓은 게센 행성에서 독자들은 “허구화된 미래란 그 자체가 곧 하나의 은유”라는 그의 말처럼 우리의 현재를 이루는 어떤 거대한 지배체제로부터 도출된 새로운 비유들을 만날 수 있다.
참고
[1] 박정오, 「여성 SF 작가가 꿈꾸는 가상세계 속의 신화와 젠더-르귄의 어둠의 왼손을 중심으로」, 영어영문학회, 제52권 3호
[2] Rhodes, Jewel P.「Ursuka K. Le Guin's The Left Hand of Darkness: Androgyny and the Feminist Utopian Vision」, Women and Utopia. Ed. Marleen Barr Nicholas O.Smith. New York,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