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구보다 일에 열정적이었던 주니어, 왜 노잼시기가 오는 걸까?
직장인에게는 3.5.7 법칙이 있다고 한다. 3년차, 5년차, 7년차에 대개 권태로움을 느끼고 이직을 한다는 것. 이 이직의 이유가 대부분은 현 직장에서의 업무 관성에 대한 지루함이나 일에 대한 번아웃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요즘은 특히나 이 시기가 빠르게 찾아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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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psychiatric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33257
여기서 '노잼시기'는 단순히 체력적으로 힘들거나 스트레스 받는 정도의 일시적인 상황을 말하는 건 아니다. 일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회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지?' '조직을 떠나야 하나?'같은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되는 시기를 말하는 것이다.
주변 주니어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1-2년차인데도 노잼시기를 겪으며 이직이나 퇴사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반 이상인 것 같기도 하다. 더 놀라운 건, 이들 중 대부분이 본인의 일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업무수행이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이런 경우 단순한 노잼 감정 뿐 아니라 조직와 업무에 대한 회의까지 느끼는 경우가 많더라.)
일에 대한 권태라고는 없을 것 같던 '주니어 일잘러'들이 이른 퇴사와 이직을 겪는 과정을 보면서 궁금해졌다. (사실 나도 요즘 좀 이 시기가 찾아오기도 했고..)
너무 많은 양의 업무를 받거나 너무 어려운 일을 맡았을 때 해결하고 싶은 마음보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드는 경험, 누구나 해봤을 것이다. 이처럼 물리적으로 내가 다 해낼 수 없는 일을 마주했을 때 사람들은 응당 무력감을 느낀다. 주니어가 아니라도 누구나 그렇다.
특히 작은 기업의 경우 주니어가 한 사람의 몫, 그 이상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제대로 된 인수인계나 교육도 없이 실무에 투입되어 허둥지둥 하는 경우도 있고, 연차에 비해 너무 큰 책임을 맡아버려 난감한 경우도 흔하다. (어떤 회사에서는 2년차 막내인데도 '과장' 직함을 달고 있는 사람도 봤다.) 물리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너무 큰 일의 무게를 느낄 때 주니어는 절망과 허망함을 느낀다.
큰 책임에 따른 큰 돈을 준다면 모르겠지만 대부분 그런 경우는 없지 않은가.
대부분의 주니어들은 일에 대한 열정과 미래에 포부를 안고 입사한다. 허나 조직 내에서 단편적이고 반복되는 업무만 한다고 느껴질 때는 나라는 인간 자체가 하나의 조직 소모품처럼 여겨져서 외롭고 슬프다. (물론 안 그런 직장인이 어디있겠냐만은... 이 글에서는 단순 반복 업무가 심한 경우만 다룬다.)
내 주변에서는 흔히 이런 사례들이 있었다.
BX디자이너로 입사했는데 배너 베리에이션만 주구장창 한다. 색깔을 좀 더 밝게, 카피 바꿔서, 정도의 디렉션만 받고 있고 전혀 디자인 개발은 하지 못한다.
조직 내 가장 어린 막내라고 한 가지 프로젝트에 인입시켜주지 않고 여러 프로젝트에 대한 유저 모니터링만 시킨다. 하루종일 각종 커뮤니티들을 돌아다니면서 댓글만 보는데, 이 이상으로 프로젝트 기획이나 방향성에 참여하지는 못한다.
물론 장기적인 커리어를 위해 작은 일부터 수행할 필요가 있지만, 이 업무를 통해 '내가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괴로워진다. 기획을 위한 모니터링, 디자인 어셋 개발을 위한 베리에이션은 참을 수 있지만 '3-5년차가 되어도 이 일만 하고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 갑작스러운 일 노잼시기에 빠질 수 있다.
이전에 함께 일하는 분이 이런 말을 했다.
"지금 하는 업무들, 유저를 보고 일하는 것 같아요, 아님 조직장을 보고 일하는 것 같아요?"
이 말을 듣는 순간 두개골이 띵하고 울리는거다. 내가 만들고 있는 문서, 내가 기획하는 캠페인, 내가 선정한 프로모션 아이템.. 이것들이 유저가 아닌 조직장을 만족시키기 위한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내가 수행하는 업무들이 소모적이게 느껴졌다.
입사하면서 머리가 꽃밭으로 가득찼던 주니어는 1-2년차가 되면서 슬슬 내 아이디어가 '보고와 컨펌 체계'에 의해 깎여나가는 과정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대체 내 머리로는 이해되지 않는 의사결정도 경험하게 된다.
조직장은 물론 많은 이해관계를 고려하여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한다. 그러나 각 부문 간의 기싸움(?), 예산 분배 문제, 우리 부문의 기조, 상위 조직장의 변화 등을 이유로 가끔 이해되지 않는 의사결정이 떨어질 때도 있다. 몇 개월 간 준비했던 프로젝트가 마치 휴짓조각처럼 작아져서 날아다니기도 한다. (ㅠㅠ) 이런 경험이 잦아들기 시작하면 주니어는 큰 실망감을 느낀다. 조직장과의 신뢰관계가 조금씩 침식되는 느낌도 든다.
의사결정과 컨펌... 이런 것들은 사실 100% 컨트롤 할 수 없는 자연재해라고 생각해야 한다. 최대한 대비는 할 수 있지만 그것들이 내 마음을 무너트리는 것에만 집중하고 축 쳐져있으면 안된다. 다음 재해에도 대비를 해야 하고, 내년 농사도 계속 지어야 하지 않은가.
03과 비슷하지만, 조금 더 거시적인 관점에서의 이야기다. 내가 속한 파트, 팀, 부문이 아니라 내가 속한 회사 자체에 실망하게 되는 경우다.
예를 들면...
의사결정 과정이 일방적이고 조직원들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다. (특히 연봉이나 복지 관련된 결정의 경우 더더 민감해진다.)
어떤 일이든 조직원들이 우선순위에서 배제되어 있다.
사회, 언론에서 다뤄지는 회사의 행보가 부끄럽다.
이런 과정에서 조직원들은 이전처럼 회사를 신뢰하지 못한다. (회사를 100% 신뢰하고 일하는 사람이 어디있겠냐만은...) 조직원들의 마음 속 사소한 균열은 차차 '신뢰없는 조직 문화' 형성에 기여하고, 결국엔 그 회사에 몸 담고 있는 자체가 지긋지긋해진다.
02와 다르게 일을 너무 열심히 해도 노잼시기가 찾아올 수 있다. 이 경우 단순한 노잼시기라기보다 번아웃과 함께 오는 위장 노잼시기에 가깝다.
MBTI J인 나는, 회사생활이 아니더라도 이런 경험이 인생에서 꽤 잦았다. 다시금 나를 다잡는 수능 100일 전,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대학생활 초기, 취업 준비 중, 일을 잘하고 싶은 주니어 기간... 특히나 '뭔가를 더 힘줘서 잘해보려고 할 때' 금방 지친다. 월 단위로 짜던 계획을 주 단위, 일 단위, 심지어는 시간 단위로 짜게 되고 그 중 하나라도 못 하면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한다. (심할 때의 나는 계획을 지키지 못하면 머리카락이 뭉텅이로 빠지기도 했다..)
이는 01에서 다뤘던 것처럼, 물리적으로 해낼 수 없을 지경의 과도한 업무 강도/난이도로 다가온다. 누군가 일을 줘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심하게 셀프 매니지먼트 하다가 발생하는 일인 것이다.
스스로에 대한 과한 채찍질을 멈춰야 한다. 나의 나약한 면을 무시하고 혐오하거나 몰아세우지 말자. 그 조차도 나도 일부다. 부족하기에 더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거라고 생각하자.
추가적으로, 번아웃에 대한 좋은 글이 있어서 공유한다.
https://blog.cowkite.com/blog/2112302012/
이건 물론 단순히 일 말고도 인생의 법칙에 다 적용할 수 있다.
일상 루틴이 완전 바뀔 줄 알고 결혼생활을 기대했는데...
웨이팅이 엄청난 맛집이길래 기다렸다가 먹었는데..
바디프로필만 찍으면 지긋지긋한 식단도 끝인 줄 알았는데...
너무 큰 기대 뒤에는 더 큰 실망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놈이 그놈'이라고 말한 이효리의 명언처럼, 회사도 '그 회사가 그 회사'라고 생각하면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일할 수 있다. 회사가 내 인생의 가장 큰 획이자 변화라고 기대하면 조직 개편, 인사 이동, 의사 결정, 프로젝트 흥망 등 사소한 것에도 실망할 수 있다. 원하던 그 회사에 가면 내 인생이 바뀔 것 같지만 사실은 아니다. 그저 내가 속한 환경이 변할 뿐이다. 인생의 모든 것을 회사에 베팅하지 말자. 회사에서 자아의 전부를 채우려 하지 말자.
나는 대구에서 올라와 혼자 회사생활을 하고, 판교에 친구도 없고, 재택근무를 하면서 내 생활 반경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자취하다 보니 대학생활에 비해 생활반경도 굉장히 축소되어, 내 삶 자체가 작아진 것처럼 느껴진다. (이래서 사람들이 일찍 결혼을 하나..)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흙이 아주 오래 천천히 쌓이는 것처럼 먹고 사는 스트레스가 내 몸 어딘가에 퇴적되고 있는 것 같다는...
일을 하다 보면 아주 사소한 스트레스들이 쌓인다. 출퇴근길 만차든, 통장 잔고든, 오늘 저지른 실수든... 누구나 이런 쌓인 이야기들을 마음 터놓고 풀 곳이 필요하다. 내 감정을 탈탈 털어둘 수 있는 방공호를 만들자. 꼭 사람이 아니어도 된다. 가벼운 취미여도 되고, 좋아하는 드라마 시리즈여도 된다. (나는 한때 아무 생각 없이 중등 수학을 풀었었다.) 일이 나를 짓누르지 않게 지탱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을 기르자.
연인을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3일을 못 잔 상태에서 다정하게 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일 역시 마찬가지다. 일을 너무 좋아하고, 성과도 좋고, 조직에 대한 만족도가 높더라도 내 체력이 떨어지면 일을 버텨내지 못한다.
(평범한 사무직 직장인이라는 가정 하에) 계속 앉아있기만 한 상태에서 머리만 쓰고, 일에만 몰두하면 안 된다. 몸이 감당하는 무게를 무시하지 말자.
다음 주제에서는 '주니어 노잼시기'에 대한 나름의 극복법을 다뤄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