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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평화 Aug 29. 2019

책을 보고 눈물이 나는 건 울고 싶을 때 책을 봐서다

무슨 바람이 불었을까. 그저 손에 닿는 곳에 그 시집이 있어 책장을 넘겼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시큰해진 코에서 물컹한 콧물이 떨어지기 직전인 위기일발의 상황. 방구석에서 먼지와 함께 굴러다니던 두루마리 휴지를 한 바퀴 휙 돌려 "킁~"하고 코를 풀었다. 한 번 쏟아지기 시작한 눈물은 전후 사정 안 가리는 주책바가지처럼 쏟아졌다. 코를 10번 풀어제낀 후에야 눈과 코가 분위기 파악을 하곤 수도꼭지를 잠갔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와우~ 이 시집 이렇게 감동적이었나?
나 시집 보며 눈물 뚝뚝 흘리는 문학소녀?


책장을 거꾸로 넘겨갔다. 아까는 보이지 않던 문구들이 다시 보였다. 이 시어들에 왜 눈물 콧물을 쏟은 거지?


영화 '버스, 정류장' 중

다시 중학생에게

사람이 길을 가다 보면
버스를 놓칠 때가 있단다

잘못한 일도 없이
버스를 놓치듯
힘든 일 당할 때가 있단다

그럴 때마다 아이야
잊지 말아라

다음에도 버스는 오고
그다음에 오는 버스가 때로는
더 좋을 수도 있다는 것을!

어떠한 경우라도 아이야
너 자신을 사랑하고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너 자신임을 잊지 말아라.

별리

괜찮아 괜찮아
곧 만날 거야 우리 곧
만나게 될 거야.

소망

가을은 하늘을 우러러
보아야 하는 시절

거기 네가 있었으면 좋겠다

맑은 웃음 머금은
네가 있었음 좋겠다

영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중

서툰 이별

머뭇거림도 없이 훌쩍
네가 떠났을 때
나는 창밖의 안개가 너라고 생각했다
안개 속으로 보이는 산이 너라고 생각했고
안개 속에 추레히 서있는 나무들이
너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나는 너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네가 떠나던 날의 안개를 더 사랑하고
안개 속의 산과 나무들을
더사랑했는지 모른다

사람보다 안개를 더 사랑하고
안개 속의 산과 나무들을 더 못 잊어하다니!
어쩌면 나의 사랑은 네가 아니고
언제나 너의 배경이었는지도 모르는 일

왜 이렇게 나의 사랑은
끝까지 서툴기만 한 것이냐!


다시 시어를 찬찬히 짚어보며 알게 됐다. 책이 나를 울린 것이 아니라 실은 내가 울고 싶었다는 것을. 나를 울릴 도구로 간택된 것이 시집이었고 시였고 시어였다는 것을.


참담하다 못해 처절하게 멘탈을 찢어놓은 과업에 대한 평가. 별생각 없이 내뱉은 조카(내겐 사촌)의 임신 소식 이후 엄마와 나 사이에 흘렀던 1초 간의 어색한 침묵. 엄마의 눈빛에서 읽히는(아닐지 모르지만 자격지심 때문인지 그렇게 읽히는) '아차'하는 후회감에 밀려오는 비참함과 함께 오는 죄책감.


아침부터 밤까지 부딪힌 여러 가지 의미에서 스스로의 한계와 그로 인한 무력감으로 눈물 의지가 항아리 입구까지 찬 가운데 떨어진 시집이라는 물방울이 항아리를 왈칵 넘치게 한 것이라고. 사실 그 항아리는 와장창 깨져 독 안에 물을 다 쏟아내고 싶었는지 모른다.


노시인에겐 죄송하지만 책을 보고 눈물이 났다기보다 울고 싶어서 시집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집은 와르르 눈물을 쏟아내기엔 내겐 좀 민망한 도구다. 왈칵 눈물을 쏟기엔 소설이 제격. 내일 출근이 걱정되지만 오늘 밤엔 '엄마를 부탁해'에게 눈물을 부탁해봐야겠다.


#나태주 #시인 #시집 #마음이기운다 #슬픔 #눈물 #감정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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