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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평화 May 24. 2018

"아파트를 포기하니 편해지더라"

사는(buying) 집 대신 사는(living) 집을 택할 수 있을까

강남은 갈 능력도 의지도 없다


사대문(四大門) 안, 서울의 심장부임에도 불구하고 서울의 어느 곳보다 시간이 느릿느릿 흐르는 곳이 있다. 복잡한 대학로와 왁자지껄한 성균관대학교 앞 번화가를 조금만 벗어나면 보이는 조용한 주택가.


지난 세월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낡은 간판이 이어지는 혜화동은 초행자도 무장해제시키고 어린 시절의 아련한 기억을 소환시키는 강력한 힘이 있다. 처음 만난 그때부터 혜화동은 그랬다.  


대학시절 이곳에 둥지를 튼 뒤 직장인이 된 뒤에도 그곳을 떠나지 않은 당시 남자 친구를 통해 처음 혜화동에 발을 디딘 친구 A는 결혼을 한 뒤 자연스럽게 이곳에 자신들의 첫 터전을 마련했다.


얼마 전 만난 A는 "강남은 갈 능력도 의지도 없었는데 아파트까지 포기하고 나니 편해졌다"며 "동네가 너무 좋은데 앞으로 계속 빌라에 살아도 괜찮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혜화동 사랑꾼'의 '동네 부심'으로 치부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날 A의 비(非) 강남, 비(非) 아파트 선언(?)은 눈덩이처럼 조금씩 커져 내게 거대한 물음이 되어 돌아왔다.


(30대 모두라고 단언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내가 함께 대학시절을 보냈던 사람들로 대변되는) 우리 세대들에게(혹은 우리 세대를 넘어선 한국사회 보편적인 인식 속) 강남과 아파트가 갖는 상징성은 단순한 지역과 주거지 이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냉정해져 보면 내 앎과 삶의 가장 극명한 불일치의 정점에 아파트가 있다. 머리로는 집은 사는(buying) 것이 아닌 사는(living) 곳이라고 생각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집, 더 구체적으론 아파트를 통한 재산증식의 욕구가 꿈틀거리고 있다.


남의 아파트(가격)는 (내가 살 수 있을 만큼) 떨어졌으면 좋겠지만 내가 살 아파트는 (시세차익을 크게 올릴 정도로) 올랐으면 좋겠다는 아이러니도 함께. 언행불일치의 정점에 아파트가 있는 것이다.


알타베에 따르면 주택이 자신의 실제 계층보다 더 상위 계층에 속해 있음을 입증할 수 있는 수단이 되기 때문에 거주 장소는 자신의 계층을 정의하기 위한 하나의 목표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도시 중산층을 의미하는 가장 함축적인 상징으로 고층 아파트가 자리 잡았다는 것은 분명 특이한 점이다... 1998년까지 분양제도에 따른 가격 통제로 지불능력이 있는 계층에게 부의 축적을 가져다준 아파트는 한국의 중간계급을 형성시킨 진정한 공장이었다.

-발레리 줄레조의 '아파트 공화국(프랑스 지리학자가 본 한국의 아파트)' 중-


광역시를 넘어서 소규모 도시, 농어촌지역까지 아파트가 스며들면서 아파트가 중산층 이데올로기의 표상 체계라는 프랑스 지리학자의 통찰은 다소 희석됐지만 수도권으로 한정해 본다면 아파트는 여전히 쾌적한 주거공간을 넘어선 중산층의 안정적인 재산 축적의 기반이다.


A의 외침이 무겁게 다가온건 앎과 삶의 괴리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나의 찌질한 모습을 그의 선언을 통해 새삼 인지했기 때문이다. 아파트와 결별 선언은 집을 통한 재산증식 열차에 올라타지 않겠다는 결연한 선언이자 집으로(라고 쓰고 '빚으로'라고 읽는다) 현재의 행복을 저당 잡히지 않겠다는 외침이었다.


티끌은 모아봐야 티끌이다


"티끌은 모아봐야 티끌이야" 오랜만에 만난 친구 B가 "이제야 인생을 좀 알 것 같다"며 무릎을 쳤다. "돈은 월급을 모아 모으는 것이 아니라 아파트로 버는 것"이라며 서울의 주요 아파트 단지 청약일정을 줄줄이 읊었다.


한 가구가 숨만 쉬며 월급을 12년 가까이 모아야 겨우 서울의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고 부동산 가격 증가율이 근로소득 증가율을 훌쩍 넘어서는 나라이니 B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돈은 아파트로 버는 것"이라는 말에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으면서도 한편으론 "아파트를 포기하니 편해졌다"는 A의 말이 머리를 맴돈다. 월급 12년 치를 모으지 않아도 되는 삶, 혜화동으로 이사를 가서 고민해볼까. 나이가 들수록 인생이 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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