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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라이세이 Sep 23. 2020

중국단풍(게으름뱅이)

가을_10월 25일의 탄생화


게으름뱅이 세상에 있다. 무언가 생각한다면, 그것을 실천하기 귀찮아지는 세상. 생각은 가득한데 막상 이루어지는 것은 별로 없는 세상. 그 세상에서 플레이리스트를 만드는 일이란 정말 귀찮아도 너무 귀찮은 일이다. 차라리 누군가 만들어둔 플레이리스트를 틀어버리지. 라디오나 켜서 다른 사람들의 신청곡이나 들어버리지. 그래서 본인은 플레이리스트랄 게 없다. 음원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나의 플레이리스트를 보여주면서 '나 이런 사람이야!', 나를 표현할 음악 리스트가 없다는 말이다. 이건 모두 게으른 탓이다. 그런 게으름뱅이에게 플레이리스트가 있다면, 그건 정말 엄청난 용기를 발휘해 만들어 낸 플레이리스트인 것이다. 혹은 누군가가 남겨둔 플레이리스트이거나. 


따로 플레이리스트가 없는 탓에 정해진 순서대로 음악을 듣기보다는 흘러나오는 음악을 그대로 듣는다. 유튜브나 음원 사이트에 만들어진 'ㅇㅇ테마의 음악' 따위의 것을 통해서. 라디오를 통해서. 그래서인지 따로 가사를 외우는 음악도 많지 않다. 그나마 가사를 외우는 노래란, 종종 유튜브 클립으로 올라오는 슈가맨 노래같이 옛날 노래들이다. 이건 어린 시절 선물 받았던 플레이리스트 덕이다.


mp3 플레이어를 쓰던 때였다. 초등학생이던 나는 아직 mp3가 없었다.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었다. 그때 사촌 형이 새로운 mp3를 샀고, 나는 형의 mp3를 받았다. 256MB짜리 mp3였다. 지금 생각하면 어플 몇 개만 깔면 사라지는 용량이었지만 그때는 무려 80곡에 가까운 노래를 넣을 수 있는 용량의 무엇이었다. 그 mp3 안에는 사촌 형이 듣던 노래들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사촌 형의 플레이리스트. 그리고 나는 그대로 mp3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게으름뱅이의 첫 플레이리스트였다.


사촌 형의 플레이리스트라고 해봐야 10대의 남학생의 플레이리스트였기 때문인지, 그 시절의 남학생들이 좋아하는 발라드들 가득과 조금의 다른 장르의 노래들이 있었다. 사촌 형의 취향이 메이저는 아니었는지 처음 들어보는 가수의 노래가 함께 있었다. 루그, 멜로브리즈, 듀크... 그리고 나는 이 가수들의 노래 몇 곡의 가사를 외웠다. 다른 친구들은 알지 못하는 올드 취향의 플레이리스트로. 루그의 '죄'며, 멜로브리즈의 '모-메모리'라든지, 듀크의 '슈퍼맨' 같은 곡들로 채워진.


그리고 그 이후에 딱히 플레이리스트랄 게 없다. 그런 식의 게으름으로 음악이든, 책이든, 이런저런 카테고리에서 나만의 리스트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취향은 무색무취이고, 주말은 심심하다. 그렇지만 밖에 나가 놀 거리를 찾고 쉽지는 않다. 하여 따로 리스트가 필요 없는 낮잠을 잔다. 낮잠을 자다 문득 든 생각이 생겨도 행동에 옮기기 귀찮으니 밥을 챙겨 먹고 일찍 자버린다. 게으름뱅이 세상에 있다. 잠이나 실컷 자고 플레이리스트랄 것은 없는.


_에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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