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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라이세이 Sep 23. 2020

마(운명)

가을_10월 20일의 탄생화

"여보세요? 네, 네. 네? 제가요? 정말요? 아 네네, 네 그럼요, 아 우편으로 보내주시겠다고요? 네 확인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때는 한 달 전, 아침에 무심코 TV를 켜둔 채 출근 준비를 하던 중 방실의 눈에 한 광고가 들어왔다. 단 한 명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초호화 무인도 리조트 광고였다. '현실판 유토피아'라고 불리는 이 초호화 무인도 리조트는 호텔 업계의 큰 손이던 명성 호텔 회장이 3년 전부터 야심 차게 추진한 사업이었다. 김회장은 수많은 타인과 만나면서 질려버린 사람들, 시끄럽고 복잡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현대인을 위해 "오로지 단 한 사람만을 위해 마련된 럭셔리 힐링 플레이스"를 기획했다. 섬 한가운데에는 유명 건축가가 설계한 아름다운 모습의 리조트가 있었으며, 그 안은 온갖 금은보화와 예술품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리조트 주위에는 꿈속에서만 볼 수 있을 것 같은 아름다운 정원과 수영장을 가꾸어 놓았다. 무엇보다도 가장 놀라운 것은 사람이 숙박객 외에는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이다. 모든 서비스는 AI가 대신했다. 기존 호텔이나 리조트에서 인간이 하던 모든 서비스는 기계의 몫이었다. 편하게 쉬는 곳에서조차 사람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이 극단적인 설정은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숙박객이 어디 있든 작은 소리로 도움을 요청하면 매너 좋은 로봇들이 바로 나타나 문제를 해결해주었으며, 식사시간이 되면 근처 호텔 레스토랑에서 갓 만든 최고급 요리가 초음속으로 날아가는 드론에 실려 배달이 되었다. 그야말로 최첨단 기술 초호화 럭셔리가 융합된, 광고 속 말을 빌리자면 '사람이 살 수 있는 공간 중 가장 유토피아에 가까운' 리조트였다. 

방실이 본 것은 바로 이 리조트의 그랜드 오픈 기념 이벤트 광고였다. 추첨을 통해 단 한 명에게 이 리조트의 모든 프리미엄 서비스가 다 포함된 일일 숙박권을 증정한다는 것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마치 당첨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걸 알면서 로또를 사는 마음으로 방실은 이벤트에 응모했다. 하루 숙박비만 4억 5천만 원이라 웬만큼 돈이 많지 않고서야 꿈도 꿀 수 없는 이곳을 자신이 가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꿈에도 해본 적이 없는 방실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현실이 되었다. 엄청나게 비싼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예약은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해 돈이 많아도 못 가는 이 리조트에 방실이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항상 웃고 살라는 뜻으로 부모님이 지어주신 자신의 이름과 다르게 잘 웃지 못하던 나날들이었다. 상반기 취업 준비를 하면서 탈락의 쓴 잔을 연거푸 마셔댔고, 그 와중에 자취방 월세와 관리비를 스스로 마련해야 했으므로 야간에는 편의점 알바를 매일 다녔다. 술에 취한 아저씨의 험한 말에도 미소를 지으면서 응대를 했고, 바닥에 흘린 컵라면 국물과 비닐 쓰레기를 치우며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들과 만나서 맘 편히 놀았던 기억은 이미 잊힌 지 오래였다. 매일 아침이 따분하고 지루하고 뻔했다. 방실의 삶에 활기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이 '무인도행 티켓'이, 방실의 얼굴에 환한 웃음을 찾아주었다. 방실은 어렸을 적 친구들과 부루마블을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친구들이 모든 나라를 이미 다 사버린 탓에 자신은 어디를 가도 통행료를 거하게 낼 수밖에 없었다. 


그때 방실은 주사위의 도움으로 무인도에 갇히게 되었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친구들은 무인도에 갇히면 짜증을 냈지만 방실은 안심했다. 방실에게 무인도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게임에 유일한 안식처였다. 그리고 지금, 방실은 그 안식처로 떠날 수 있게 되었다. 단 하루뿐일지라도.


다음 날 아침 방실은 빌라 출입문으로 나가 우편함을 확인했다. 그 안에는 편지봉투가 하나 있었다. 평소 편지라곤 관리비 통지서나 학교에서 날아오는 동문회 신문이 전부였으므로, 이 편지는 분명 그 티켓이었다. 발신인 란에는 역시나 명성 호텔이라는 글자가 금빛으로 우아하게 적혀있었다. 방실은 편지봉투를 품에 꼭 안은 채 집으로 들어왔다. 혹시나 안에 든 티켓이 찢어질까 조심조심 편지봉투를 열었다. 그리고 안에 든 내용물을 꺼냈다. 접혀있는 종이는 방실이 생각했던 것보다 고급 졌다. 두꺼운 종이에 금색의 휘장 장식이 그려져 있었다. 

방실은 떨리는 마음으로 종이를 펼쳐보았다. 종이 안에는 길지 않은 문장 몇 줄이 써져 있었다. 글을 읽는 순간 방실은 정신이 멍해졌다.


_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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