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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라이세이 Sep 23. 2020

들장미(시)

가을_10월 27일의 탄생화

   

"소년이여, 시를 써라!"


학교 국어 선생님이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항상 외치는 말이다. 외국 교육자가 한 말이라는데, 누가 말한 것인지도 모르겠고, 맞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시를 써라"가 아니라 "야망을 가져라" 아닌가? 하지만 국어 선생님은 꿋꿋이 매번 수업 전 시를 쓰라고 외치고 다녔다. 정작 자신은 시를 쓰는지 의문이었다.


위염으로 고생한 날이었다. 급식도 먹지 못하고 이온음료만 마신 채 책상에 엎어져있었다.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자 들장미 담장 주위를 걷고 있는 국어 선생님을 보았다. 무언가를 쓰고 있는 듯했다. 걷다가 하늘을 보다가 장미를 만지다가 잎을 따다가 무언가를 적다가 주위를 살피다가 눈을 감다가 다시 걷기를 반복했다. '시를 쓰는 건가? 말로만 우리에게 떠드는 것은 아니었네'라고 생각하는 순간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몰래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염탐한 사람처럼.


체육수업 시간, 나는 위염으로 계속 교실에 있을 수 있었다. 급식시간 바로 다음 시간이 체육수업이어서 반 친구들과 2시간째 떨어져 있었다. 아이들이 마구 던져놓은 교복을 보고 내가 입고 있는 교복을 보니 약간은 유령이 된 느낌이 들었다. 예전에 웹툰에서 학교에 돌아다니는 유령들은 계속 교복을 벗지 못하고 떠돈다는 장면을 본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바람이 불어 녹색 커튼이 흔들리는 교실에 혼자 앉아 햇빛을 쬐고 있자니 조금은 감상적이게 되는 것 같았다. 포스트잇을 하나 떼어 책상에 붙이고는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펜을 들었다.


떠다니는 초록

낮잠보다 가벼운 초록이 교실 사이를 맴돈다.
초록이 바라본 자리마다 들장미가 피어난다.
옷을 벗은 아이들은 자유다.
옷을 입은 초록은 비자유다.
떠다니는 초록.
떠다니는 몽상.


"시 쓰니?" 


교실 문에서 들려온 소리에 놀란 나는 두 손으로 얼른 포스트잇을 가렸다. 눈을 돌리자 문에 서 있던 국어 선생님이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동수업 시간 아니야? 왜 교실에 남아있어?"


나는 위염 때문에 체육수업에서 빠졌다고 말했다. 내가 쓰고 있던 시 이야기를 제발 하지 말아 달라고 속으로 빌고 있었다. 시를 쓸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던 위염이 다시 바늘로 배를 찌르는 듯이 아파지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그저 아프면 양호실 가서 누워있으라며 간단하게 말하고는 교실을 나가려고 하고 있었다.

   

"선생님 아까 점심시간에 시 쓰시고 계셨어요?" 


왜 내 입에서 이 질문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말투도 시비 투였다. 내가 시를 쓰고 있는 모습을 들킨 것 같아 반대로 선생님이 시를 쓰고 있는 모습을 들켰다는 것으로 덮고 싶었나 보다.


"봤구나. 날씨가 좋아서. 그리고 오늘 기분이 안 좋아서. 항상 내 주변이랑 내가 정반대 상태일 때 그걸 맞추기 위해서 시를 쓰거든. 주변을 관찰하고 내 상태를 관찰하면서 글로 풀어내면 두 세상이 어긋났다가 다시 맞춰지는 느낌이 들어. 그래서 너희한테   도 항상 시를 쓰라고 말하는 거야. 정말 뭐든 다 하고 싶은 상태인데 주변 환경은 다 하지 말라고 하거든. 그 불일치를 시를 쓰면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


나는 선생님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여 책상에 누웠다. 선생님은 아무 말 없이 교실을 나가셨다. 오늘 수업에 국어가 없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눈을 감았다. 그러다가 다시 눈을 뜨고 시가 쓰인 포스트잇을 휴대폰 케이스 안쪽에 붙였다. 창밖을 보니 어제보다 들장미가 더 피어있는 듯하다. 


_제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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