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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라이세이 Sep 23. 2020

파인애플(완전무결)

겨울_12월 20일의 탄생화

너무나 완벽해서 티끌 하나도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소망이던 때가 있었다. 교복을 입고 매일 아침 학교를 향하던 시절 나는 소위 말하는 '완벽주의자'에 가까웠다. 큰 시험에서 한 문제라도 틀리면 그게 그렇게도 서러워 방에서 남모르게 눈물을 훔쳤다. 완벽하게 준비하지 못한 나 자신이 원망스럽고 한심했다. 학교에서 누군가가 '올백'을 맞아 전교 1등을 했다는 말이 들려오면 그 감투가 부러웠다. 유명 브랜드 신발이나 게임기는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내가 바랐던 건 모든 문제 번호에 빨간 동그라미가 그려진 완벽한 시험지와, '전교 1등'이라는 완벽한 성적이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 누구와도 갈등이 없는 인간관계를 추구했다. 그때 나에게는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해야 한다는 것이 일종의 신념이었다. 그래서 아무와도 다투거나 실랑이하지 않았다. 간혹 내게 누군가 시비를 걸거나 짜증을 유발해 화가 나는 일이 생겨도 절대 화를 내지 않았다. 내가 화를 내면 그 사람이 나를 싫어하게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나를 친구 들은 부처 같다고 말했다. 물론 지금은 그게 썩 좋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때는 그게 이상적인 인간관계의 모습이라고 굳게 믿었다.


사람은 신이 아니기에 완벽할 수 없다는 건 그때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완벽하지 않을까, 하고 스스로에게 타박을 주던 날이 많았다. 그런 습관성 자책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판단으로 제어가 잘 안 되는 종류의 것이었다.


개인적인 성취나 인간관계에 있어 결점이 없이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이 사라지기 시작한 건, 혼자 여행을 다니며 마음의 여유를 찾았을 무렵부터다. 여행은 우물 안 개구리처럼 갇혀있던 사고의 틀을 깨지게 만들었다. 딱딱하던 사고회로가 무너지자 스스로에게 들이미는 잣대가 조금씩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세상은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넓었고,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으며, 저마다 너무나 다른 삶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중 어느 것도 더 나은 삶이라거나 더 열등한 삶은 없었다. 자기가 선택한 삶의 기준과 방향 속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과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물론 나는 후자였다.


그 후로 나는 스스로에게 관대해지기 시작했고 여행에서 느꼈던 삶의 여유와 행복을 일상에서 찾기 시작했다. 내가 추구하는 가치에서 완전무결함을 떨어트리자 한결 편안해졌다.


사람은 완벽하지 않다. 신이 아니며 로봇도 아니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흠결을 내포한다. 다시 말해 흠결은 '사람다움'의 필수 조건이다. 자기 발전과 성취를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흠결을 메우려는 모습도 아름답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각자의 흠결이 있음을 인정하고 보듬어주며 그런 사람다움을 사랑해주는 모습은 더더욱 아름답다. 우리는 전자의 중요성은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많이 듣지만 후자의 중요성은 많이 듣지 못한다. 오히려 내가 가진 사람다운 모습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부끄럽게 여기고 숨기고 없는 척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좁아지는 건 내 마음이다. 점점 더 나를 강한 족쇄로 묶어두고 힘들게 만든다.


그러지 말자.


우리는 우리가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걸 조금 더 알 필요가 있다. 나를 지금보다 조금은 관대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어쨌거나 내 삶을 사는 건 다른 사람이 아닌 오롯이 나 아닌가. 내가 나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지 않는다면 누가 나를 사랑스럽게  봐줄 수 있을까.


_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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