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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라이세이 Sep 23. 2020

빨강봉선화(날 건드리지 마세요)

가을_10월 19일의 탄생화


에메랄드빛 초록으로 가득 찬 아름다운 숲, 그 속에서 동물과 함께 자라온 소녀가 있었다. 소녀는 세상 누구보다도 자유로웠고, 숲에 사는 모든 존재와 교감했으며, 자기가 살고 있는 숲과 자신의 삶을 사랑할 줄 알았다. 현명한 곰과 사슴에게 숲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으며, 수많은 새들과 함께 날아다녔다. 토끼나 다람쥐 같은 작은 동물들과도 친구를 맺었고, 심지어 벌이나 개미들과도 함께 놀았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녀는 우연히 숲 근처 마을의 사냥꾼들과 마주쳤다. 사냥꾼들은 즉시 마을로 돌아가 소녀의 존재를 알렸다. 마을 사람들은 소녀를 도와야겠다고 의견을 모았다. 이들은 어린아이가 홀로 숲에 버려진 걸 안타까워했다. 그랬다. 사람이 숲에서 동물들과 함께 산다는 것은 이들이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소녀를 가여워했다. 보살펴줄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고 여겼다. 정작 소녀는 아무렇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조차도 소녀가 세상을 잘 몰라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숲으로 몰려가 소녀를 찾아내어 말을 걸었다.

   

“너는 지금 아주 불쌍한 처지란다. 너는 잘 모르겠지만 이 세상의 어떤 아이도 이렇게 부모의 보살핌 밖에서 막무가내로 자라나지는 않아. 곰의 젖을 먹거나 풀을 뜯어먹지도 않고. 우리에겐 더 맛있고 훌륭한 음식들이 가득하고, 너를 위해 기꺼이 만들어 줄 준비가 되어 있단다. 이제 이런 힘든 생활은 그만두고 우리와 함께 마을로 가자. 너는 그곳에서 지금보다 훨씬 행복할 거야.”

소녀는 숲을 떠나기 싫었지만 자기보다 몸집이 큰 어른들이 몰려와 업고 가는 바람에 억지로 마을로 따라가고 말았다. 소녀가 마을에 들어오자 어른들은 소녀에게 맛있는 요리를 해주겠다며 솜씨를 뽐냈다. 아저씨들은 고기를 구하기 위해 숲에 나가 큰 동물을 사냥했고, 아주머니들은 아저씨들이 잡아온 동물을 요리했다. 이들은 소녀가 산에서 풀뿌리만 뜯어먹느라 영양이 부족했을 거라고 말하며 매일 고기 요리를 차렸다. 곰 발바닥 수프, 산양 고기가 듬뿍 들어간 볶음 요리와 들소 바비큐, 비둘기 꼬치구이. 전부 소녀가 숲에 있을 때 함께 놀던 친구들이었다. 소녀는 도무지 고기를 입으로 갖다 댈 자신이 없었다. 결국 소녀는 매 끼니 속을 비워냈고 점점 말라갔다. 잎에 맺힌 이슬과 벌들이 모아준 꿀, 민들레 새순과 곰들이 잡아준 작은 물고기를 먹고 지냈던 생활이 너무나 그리웠다.

젊은 아가씨들은 소녀에게 화장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형형색색의 가루를 얼굴 이곳저곳에 칠하고 거울을 갖다 대며 연신 이쁘지 않냐고 캐물었다. 소녀는 거울 속에 들어있는 자신의 모습이 이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소녀는 아가씨들을 향해 고개를 저었지만, “이게 이쁜 거야.”라는 답을 들었다. 소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소녀가 숲에서 살 때 개울물에 비춰본 얼굴은 이게 아니었다. 흙과 풀잎이 머리칼에 엉켜있지만 행복한 웃음으로 가득 찬 얼굴, 그 얼굴이 소녀는 너무나 좋았다. 하지만 지금 거울 속 소녀의 얼굴엔 웃음이 없었다. 빨강, 파랑, 분홍, 주황색의 인공 빛으로 물든 누군가의 얼굴이 울상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이건 아름다움이 아니었다.


젊은 청년들은 숲에서 잡아온 아름다운 앵무새를 새장에 넣어 소녀에게 선물했다. 청년들은 자신들이 숲에서 잡아왔던 앵무새들 중 가장 크고 목소리도 가장 아름답다고 말했다. 하지만 소녀가 듣기에 이 앵무새의 노랫소리는 슬펐다. 소녀가 숲에서 살 때 앵무새들은 지금보다 훨씬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다. 앵무새들은 나뭇가지 사이로 떨어지는 햇빛을 맞으며 자유롭게 날아다녔고, 바람을 따라다니며 사랑의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지금 새장에 갇혀 자유를 빼앗긴 이 앵무새의 소리엔 슬픔만이 가득했다. 뿌듯한 웃음으로 가득 찬 이 청년들에게는 앵무새의 마음이 가 닿지 않고 있음을 소녀는 알 수 있었다.


결국 소녀는 보름달이 떠오른 날 밤, 모두가 잠든 틈을 타 숲으로 도망쳤다. 한 손에는 앵무새가 잡혀있는 새장이 있었다. 적당히 먼 거리를 왔다고 생각한 소녀는 새장을 열어 앵무새를 꺼내 주었다. 앵무새는 소녀의 머리 위를 두 바퀴 돌더니 깊은 숲으로 날아갔다. 소녀는 철제 새장을 내던지고 나서 개울을 찾았다. 그리고는 차가운 개울물로 연거푸 세수를 했다. 작은 손으로 얼굴에 물을 끼얹을 때마다 마을 소녀들이 멋대로 발라놓은 분칠이 조금씩 씻겨나갔다. 한 톨의 화장도 남기지 않고 씻어낸 소녀는 마을 쪽을 한 번 돌아보고는 몸을 휙 돌려 숲으로 내달렸다. 더 깊이, 마을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사람들이 소녀를 더 이상 찾아올 수 없을 곳까지 달렸다.

다시는 아무도 자기를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_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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