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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라이세이 Sep 24. 2020

수세미(여유)

그리고_수세미

시간이 많아졌다. 회사에서는 업무가 익숙해진 탓에, 퇴근 후엔 별다른 일을 하지 않는 탓에, 남는 시간이 생겼다. 게다가 새벽 5시면 일어난다. 그렇게 일어나면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방황한다. 다시금 잔다. 한 번 더 일어나도 출근까진 시간이 남는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어리벙벙 두리번거린다. 전이라면 글이라도 썼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다. 시간은 많은데 무언가 하진 않는다. 생각은 있지만 정리되지 않는다. 시간이 많아졌다.


식사는 단출해졌다. 주문한 반찬에 즉석밥을 데워 먹거나, 국물류가 있다면 누룽지와 함께 끓이면 그만이다. 요거트에 치즈를 더해 견과류나 바나나를 곁들인다. 한 끼 식사가 해결된다. 식사를 준비하는 시간이 간단해지고, 식사하는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는다. 금방 밥을 먹으면, 다시 시간이 남는다. 간단해진 식사 덕에, 설거지도 금방이다. 드라마나 한 편, 영화 한 편, 다큐멘터리나 한 편. 쉽게 영상을 접할 수 있으니 책이라도 읽을라치면 영상에 먼저 눈이 간다. 그런 탓에 독서모임에 책을 다 읽고 가지도 않는다. 설렁설렁, 어슬렁어슬렁. 요즘은 그런 기운으로 지낸다. 밖은 바이러스가 창궐하니 집 밖으로 나서지 않는다. 훌륭한 핑계다.


남는 시간, 조용해진 방, 혼자 있는 지금. 타이핑을 한다면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방 안을 채운다. 창밖으로, 문틈으로 공사장 소리나 엘리베이터 소리가 들리긴 하지만 크게 신경 쓰일 정도는 아니다. 음악을 튼다면 그 음악이 방을 채우고, 책장을 넘기면 책 넘기는 소리가 귀에 가득이다. 그리고 이제는 손으로 연필을 움켜쥐고 노트에 쓱-쓱, 사각사각 끄적인다. 의식의 흐름대로 내용을 채운다. 떠오르는 생각을 그대로 끄적인다. 한 페이지 속에 남은 글들이 소설이라면, 소설의 기본 전개인 기승전결을 완전히 무시한 채 뚝-뚝. 단어 단위로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다시 이전의 주제로 돌아간다. 그러다 뜬금없이 종료된다. 설렁설렁, 어슬렁어슬렁. 요즘 의식의 흐름이다.


해서 지금의 글도 그럴지 모른다. 그럴 확률은 높지 않지만 만일 문학비평가가 내 글을 본다면 '평가의 가치도 없음'이라고 평할지 모른다. 마치 '이런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로 시작하며 하고 싶은 말을 다 쏟아내는 사람 같은 말이다. 하지만 개의치 않는다. 그러기로 마음먹었다. 뭔가 꼭 시간을 채울 필요가 없음을 느낀다. 설렁설렁, 어슬렁어슬렁 남는 시간을 노닐어 본다. 그냥, 이런 식으로 지내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다. 이렇게 지내보지 않아서 낯선 것이란 생각이다. 여유롭다는 것이 이렇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여 설렁설렁, 어슬렁어슬렁. 시간이 많아졌다. 여유가 많아졌다. 여유로운 방황이다.


_에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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