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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주 Apr 25. 2024

먼저, 물 끓이기

첫 문장 쓰기

이제 대부분의 음식은 배달 주문으로 30분 안에 먹을 수 있는 세상이 됐다. 나의 소울푸드인 토마토 스파게티는 물론 크림, 오일, 로제 등 다양한 소스의 파스타를 언제든 몇 번의 터치면 내 앞에 가져다 놓을 수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스파게티, 파스타 만은 주문하기가 망설여진다. 외출해 예쁜 레스토랑이나 식당에서 누군가와 나누는 식사라면 모를까 스파게티 정도는 내가 직접 해 먹는 것이 맞지 않을까 하는 나만의 기준 비슷한 것을 여전히 갖고 있는 것이다. 귀찮음을 잠시 뒤로 치우고 찬장에 있던 파스타면과 냉장고 속의 토마토소스 1병을 꺼내며 생각한다. 


10분이면 만들 수 있잖아. 


그런데도 냄비에 물을 붓고 나머지 재료를 손질하는 것이 귀찮아 다시 배달 어플을 살짝 열어보기도 한다. 이럴 때 단번에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은 곧바로 냄비에 물을 올리는 것이다. 2~3인용 양수 냄비 절반 정도 물을 채운 소금 1~2스푼을 넣고 가스 레인지의 불을 켜면 그것으로 이미 요리의 3분의 1은 해낸 것이나 다름없다.


글을 쓸 때도 늘 첫 문장 쓰는 것이 가장 어렵다. 아니, 어렵다기보다는 망설여진다. 책상 주변에 가득 쌓인 책들로 시선이 분산되고, 나는 왜 그들처럼 좋은 생각을 하지 못하는지 스스로를 자책하게 된다. 예전에 쓴 책의 몇 안 되는 한 줄 평들을 곱씹기도 한다. 아무리 그래도 '중학생이 쓴 문장' 같다는 건 좀 너무했어. 갑자기 과거의 소소한 실수들이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한다. 딱 한 줄, 한 걸음만 가고 나면 걸어 나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분명 뭔가 쓰려고 앉았는데, 할 말을 잃었다.


그때 문득 몇 년째 내 PC 모니터를 단단히 받치고 있는 책을 본다. 조 브레이너드의 '나는 기억한다'라는 책이다. 나는 이 책을 결코 무시해서가 아니라 첫 문장을 쓰기 위한 신호탄 혹은 주문의 역할로 늘 바로 보이는 곳에 놓아두었다. 


존 브레이너드 <나는 기억한다>


이 책은 제목에 매우 충실하게도 '나는 기억한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나는 기억한다'로 반복되며 시작되는 짧은 산문들은 작가 조 브레이너드의 기억을 소환하고 다양한 시간과 사건을 오간다. 분명 같은 문장으로 시작되었음에도 책 한 권 분량의 짧은 글 모음집이 나올 만큼 '나는 기억한다'라는 한 문장의 힘은 강력했다. 글쓰기를 시작하는 기폭제이자 주문이 된 것이다. 이후 이 책은 미국 전역에서 많은 문인과 글쓰기 교사들의 교재로도 활용되었다고 한다. 누구에게나 '나는 기억한다'는 존재하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냄비 물이 끓기 시작한다. 다음엔 스파게티 면을 넣으면 된다. 면이 익으면 가지고 있는 소스를 프라이팬에서 함께 볶아주면 되고. 다른 재료를 넣든지 말든지 그건 내 선택일 뿐이다. 그러니 일단은 물부터 끓이자. 뭐가 되든 한 끼는 될 것이다. 그다음의 일은 손이 가는 대로. 글쓰기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 끓이듯 아무 문장이나 일단 종이 위에 써보자. 정 생각이 안 나면 조 브레이너드의 첫 문장을 살짝 빌려와도 좋다. 이렇게.


나는 기억한다. 마무리 문장을 쓰는 것이 늘 얼마나 어려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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