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트에 갔더니 한쪽 가득 수박이 쌓여있었다. 문득 스무 살쯤, 슈퍼마켓 캐셔로 아르바이트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한 여름, 커다란 수박 하나를 3천 원에 주신다길래 욕심 껏 두 덩이 샀다. 가지고 갈 방법은 따져보지도 않은 채. 양손에 끈으로 묶은 수박을 들고 휘청이며 집으로 돌아가던 길, 갑자기 쏟아지던 소나기를 맞고 그대로 미끄러지고 말았다. 깨어져 빨갛게 드러난 수박 속살 위로 무심하게 내리던 빗물과 수박물이 든 티셔츠. 끝내 빈손으로 집까지 올라가며 나도 모르게 엉엉 울었다. 그리고 그 일은 이후에도 두고두고 이야기할 웃지 못할 추억이 됐다. 어처구니 없이 무모했던 스무 살의 여름. 그날, 수박 옮기기에 성공했더라면 내가 한때 슈퍼마켓 캐셔였단 사실은 까맣게 잊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 나는 내 친구 M을 바다에서 잃었다. 친구들과 떠난 첫여름 여행이었다. 월드컵 응원을 한 바탕 치른 그다음 해였을 것이다. 그날 함께 바다에 놀러 갔던 친구들은 모두 신발까지 잃어버렸다. 모래사장에 신발을 벗어 묻어두고 물속에 뛰어들었었기 때문이었다. 맨발로 버스를 탔는데도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다. 이후 리아의 <네 가지 하고 싶은 말>이라는 노래를 알게 되었다. 그 해 여름 내내 그 노래를 들었다. 가사를 보며 작사가도 우리와 같은 일을 겪었던 걸까,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딱히 비하인드를 찾아보지는 않았다.
| 여름에 만난 사람들은 모두 여름의 모습으로 기억에 남는 것 같다. 두꺼운 외투를 입고 만나는 날이 왔다면 그는 이미 꽤 가까운 사람이 된 것이리라. 다행히 아직은 그런 사람들이 몇몇 남아있다.
| 나의 가장 가까웠던 친구 H도 몇 년 전 여름에 떠났다. H가 있던 마지막 여름에 주고받던 카톡 메시지들은 아직도 남아있지만, H의 이름은 (알 수 없음)으로 변경되어 있다. 나는 이제 H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 H와 자주 가던 시장 안 반찬가게에서 오랜만에 오이소박이를 샀다. 인기가 많아서 갈 때마다 한 두 개 밖에 남아있지 않는. H가 아니었으면 나는 거기 오이소박이가 얼마나 맛있는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오이소박이 맛은 변함이 없었다. (이 글을 쓰고 몇 달 지나 반찬가게도 폐업했다.)
| 여름에 혼자 강릉에 갔었다. 처음으로 혼자 가는 여행이었다. 바다를 보고 물회를 먹고 커피를 마셨다. 노트북을 가져가 일도 조금 했다. 맥주도 마셨다. 새로 지은 숙소에서 기념품이라며 꽃 화분을 주었고, 가져온 그 꽃은 이제 나무가 되었다. 아직도 가끔 누구에게도 공유할 수 없는 그때의 기분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