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부 한 달 살기: 불편함 속에서 찾은 나다운 삶
2025.1.28 화
길들여진다는 건 무서운 일이다.
어떤 일을 하던 대로 그대로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나에게 더 적합한 것을 찾는 과정을 생략하고, 하던 대로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세부에 오기 전까지 나는 그렇게 살았다. 사실, 생애 최초로 집을 구입해 이사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2007년 결혼한 이후 수많은 이사를 해야 했다. “어차피 내 집도 아닌데.“라는 생각이 무의식 속 깊이 깔려 있었던 것 같다. “또 옮길 텐데.“라는 생각은 임시로 어떤 곳에서 살아간다는 마음가짐을 만들어내고, 많은 선택에도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이번 집은 나에게 맞게 잘 꾸미고 싶었다. 나의 라이프스타일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 그렇다면 “나의 라이프스타일은 무엇인가?” 정의부터 해야 했다. 여기서 난관에 부딪혔다. 나의 찐 모습과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실제 나는 정리를 잘 못하는 사람인데, 내 집은 깔끔하게 정돈된 모습으로 유지하고 싶었다. 이 차이가 너무 컸다. 그래서 이사가 힘들었던 것이다.
세부에 오니 그동안 나를 힘들게 했던 상황들이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내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웠던 것 같다. 세부 한 달 살기 짐싸기도 참 힘들었다. 무엇이 필요할지 몰랐고, 혹시나 여기서 불편하지 않을까 걱정됐다. 하지만 짐을 간편하게 싸고 싶기도 했다. 출발 일주일 전부터 큰딸과 나는 “이걸 넣을까, 저걸 뺄까” 고민했다. 그렇게 고민하는 나를 보며 남편이 말했다. “필요하다 싶으면 넣어.” 결국, 출발할 때 비행기 수화물 초과금액 18만 원을 지불했다.
생각해보니 신혼여행 때도 그랬다. 첫 해외여행이라 걱정이 많았던 나에게 남편은 “여행 짐은 가벼울수록 좋다”고 말했다. 남편은 이미 해외여행과 국내 장박여행을 통해 경험이 쌓인 상태였다. 그의 말이 맞았는데도 나는 머리로만 이해했지 몸으로는 이해하지 못했다. 몸의 기억은 경험으로만 남는다.
세부에서 23일째 지내다 보니 최소한의 짐으로도 우리가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행 짐은 가벼울수록 좋다”는 남편의 말이 맞았다. 나는 ‘불편함’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두려웠을까? 불편함은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불편함과 두려움에 대해 생각하다가 ChatGPT에게 말을 걸었다. 질문은 이거였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불편함을 느낀다는 건 두려움과 이어지기도 해. 이걸 어떻게 생각해?”
ChatGPT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며 나를 위로해줬다. 특히 낯선 상황에서 위험을 피하려는 본능적인 경계심이 작동해 두려움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설명해주었다. 이 말을 듣고 이해가 가능했다. 또 다른 시각으로 불편함을 마주하고 극복해나가는 과정에서 더 넓은 시야를 얻고 많은 경험을 할 수 있다고 했다. 불편함이 두려움으로 굳어지지 않도록 원인을 찾아 해소하는 방법을 알아가는 것이 더 낫지 않겠냐며 내 의견을 물어왔다.
그 대화를 나누면서 나 스스로를 돌아보게 됐다. 어쩌면 나는 자신감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낯선 상황에서 새로운 문제를 마주했을 때 내가 그것을 해결할 수 있을지 스스로 믿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지속적인 불안감이 정리도 힘들게 하고, 짐 싸는 것도 힘들게 만들었다. 무엇이 나에게 진짜 필요한지 결정하지 못했던 것이다.
세부에서의 한 달 살기는 내 삶을 더 간소하게 만들었다. 올해 나의 삶의 키워드는 ‘정갈하게’이다. 내 삶을 더 ‘깨끗하고 깔끔하며, 단정하고 바르게’ 만들어가고자 하는 바람이 생겼다. 2025년에는 그걸 실천하며 살고 싶다. 1월의 첫 달, 외국에서 살림살이를 최소화하며 한 달 살기를 해보니 내 삶과 너무 밀착해 있을 때는 잘 보이지 않던 것들이 떨어지니 윤곽이 보였다. 그래서 나는 ‘바운더리, 경계’ 같은 단어들을 좋아한다. 나와 세상의 경계를 인지하는 그 지점에서 깨달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곳에 가져온 옷들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이 들었다. 여름 내내 입지 않았던 옷들을 여기로 가져왔다. 처음엔 여기서 입고 버리려고 했던 옷들이었다. 세탁기 사용에 익숙하지 않다 보니 옷이 줄어들거나 얼룩이 남아 한국에서처럼 깔끔하게 세탁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데도 옷을 다시 조합해 입어보니 꽤 괜찮게 느껴졌다. 갈 때 버리려고 생각했던 옷들이지만, 이제는 다르게 보였다. “더 적은 수의 옷으로도 충분히 생활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새 옷을 조금 사기도 했지만, 이번 한 달 동안의 경험을 통해 얻은 것이 더 많았다. 한국에 돌아가서는 주말마다 물건을 사러 다니는 대신, 경험을 쌓기 위해 시간을 더 많이 쓰고 싶다.
세부 한 달 살기가 끝나가는 시점에서
이제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물건이나 소유에 집착하기보다, 경험을 쌓는 삶의 방식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됐다. 세부에서 얻은 깨달음은 물건의 양을 줄이고 삶을 간소화하며, 나만의 정갈한 라이프스타일을 만들어가는 여정을 시작하게 만들었다.
“More properly.” 오늘 필리핀 영어 선생님과 단어책을 앞에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온 문장이다. 오늘 내 글의 흐름에 맞을 거 같아서 제목으로 들고 왔다. 다음 주 이 시간즈음은 한국에 도착했을 것이다. 그때부터는 나에게 더 맞게 인생을 선택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