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
“임신하면 모성애가 생겨서 다른 일은 못한데요”
“우리 회사는 하루에 16~20시간 일할 사람이 필요하지 임신으로 인한 단축근무를 하는 사람은 원하지 않아요.”
“다른 회사에서도 임신하면 보직을 변경하거나 권고사직을 한데요.”
“마케팅 일은 창의적인 일이니 루틴한 업무로 보직 변경을 하세요”
“그럼 임신하고 회사 계속 다닐 생각이셨어요?”
믿기 힘들겠지만 2024년 대한민국에서 직장을 다니다가 임신을 한 여자가 들은 이야기다.
직접 들은 나도 정말 믿기 힘들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줄 모르고 녹음도 하지 않은 내가 너무 바보 같았다.
총 15년의 경력, 이 회사에서만 2년의 경력, 잘 다니고 있던 회사에서 임신을 했더니 난 잘렸다.
그날은 임신 초기였던 시기, 컨디션은 그렇게 좋지 않았지만 그냥 견디는 날이었다.
지금 회상해봐도 참 웃기지도 않은 상황인 거 같다.
너무나도 무례한 이야기를 직접 앞에서 필터링도 하지 않은 채로 마구 쏟아냈던 대표의 얼굴과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업무 미팅인 줄 알고 시작한 대표와의 면담에서 대표는 바로 내 성과에 대해 브리핑 하기 시작했다.
단순 성과에 대한 브리핑이라면 그러려니 했을텐데, 내용이 좀 이상했다.
내가 하지도 않은 일을 예시로 들면서 내가 일을 못했다는 걸 말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래서 일단은 가만히 있었다.
지금 하고 싶은 이야기가 이게 아니라는 건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 같다.
내 성과라면서 이상한 소리를 해 댄 브리핑을 마친 대표는 “이렇게 이번 프로젝트는 실패하셨고, 어차피 지금 임신도 하셨으니 좀 쉬시면 될 거 같아요.” 라고 말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어이가 없었지만 설마 임신해서 그만두라는 건 아니겠지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대표는 이제 막 돌지난 딸아이를 가진 아빠인 걸?! 정말 설마설마 예상할 수도 없었다.
내가 아무 말이 없자 대표는 다시금 질문했다.
“이번 프로젝트 실패하신 건 인정하시는 거죠?”
난 대답했다.
“아니요? 저는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대표님이 실패라고 생각하신다면 우리 회사에서 결정권자는 대표님이신데 그럼 실팬가보죠.”
내 말에 대표는 “그럼 이게 성공했다고 보시는 건가요?” 라며 되물었다.
“이번 프로젝트는 대표님이 정하신 짧은 기한 내에 웹사이트를 전체적으로 리뉴얼 마치는 거였죠.
원하는 기획안도 있으셨고요.
지금 기획안대로 리뉴얼 완성하지 않았나요?
전 처음부터 말도 안되는 기한과 인원으로 인한 프로젝트라고 말씀드렸고, 중간에 대표님이 원하시는 기획안대로 시간도 없는데 수정 계속 했던 거까지 생각하면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이제 잘 만들어졌는지 아닌지는 앞으로 계속 테스트가 필요하고요.”
지난 3개월 내내 지지고 볶으면서 완성해낸 프로젝트를 하루 만에 실패라고 제대로 된 데이터도 내세우지 않은 채 ‘넌 실패했다’는 대표 말에 난 긍정할 수 없었다.
“그럼 실패한 걸 인정 못한다는 건가요?”
대표가 또 똑같은 질문을 했다.
이상했다.
내가 지금 실패했다는 걸 인정하라는 말투였다.
“저는 대표님이 지금 이미 결정을 하시고 난 다음에 저한테 대답을 강요하는 거 같은 기분이 드는데요.
굳이 앞서서 들어주신 실패의 예시도 제가 한 업무 아니고요.
제가 한 게 아닌 업무를 예시로 이번 프로젝트가 실패했다고 하시면 그냥 실패라고 생각하시는 거 같아서 제가 여기서 무슨 말을 해야할지 잘 모르겠네요.”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실패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사실 진짜 성공이었다.
말도 안되는 기간 내에 말도 안되는 인원으로 말도 안되는 퀄리티를 완성시켜냈는 걸!
“그럼 회사를 그만두실 생각이 없으세요?”
대화가 이렇게 흘러가자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는지 갑자기 급발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됐다.
“그럼 임신하고 회사를 계속 다닐 생각이셨어요?”
이렇게까지 말하자 그제서야 진짜 '내가 임신해서 회사를 잘리는 구나'라는 현실이 인정됐다.
“네 저는 출산하고 나서는 복직도 할 생각이었는데요?”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랬더니 이때부터 대표가 내 얼굴을 맞대고 말한 내용은 정말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무례한 이야기라 나는 대답도 잘 할 수 없었다.
대표 : “임신하면 모성애가 생겨서 다른 일은 못한데요. 저도 다른 회사 대표님들한테 조언을 구했는데, 보통 임신을 하면 회사를 그만둔데요. 특히 마케터들은 창의적인 일이다보니 임신을 하면 보직을 변경하거나 권고사직을 한다고 하더라고요.”
나 : 지금 제가 그만두지 않으면 보직을 변경하라는 말씀이신 거 같은데 그럼 어떤 보직으로 변경하길 바라세요?
대표 : 그건 아직 생각 안해봤어요.
그냥 내가 당연히 그만둘 줄 알았다는 식으로 대충 말하는 대표의 모습에 어이가 없어서 할 대답도 없었다. 내가 별 말을 하지 않자 대표는 더 무례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기 시작했다.
대표 : “지금 우리 회사는 하루에 16~20시간 일할 사람이 필요하지 임신으로 인한 단축근무를 하는 사람은 원하지 않아요.”
나 : “그럼 제가 어떻게 하길 바라세요?”
대표는 지금까지 정확히 그만두라고 말한 적이 없다. 여기서 내가 그만두겠다고 하면 권고사직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잠시 생각하는 척을 하더니 대표가 말했다.
“3가지 제안을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1번째는 당장 일주일 만에 우리 회사가 수익을 낼 수 있는 투자금액을 유치하는 것과 이에 대한 전략을 오늘 퇴근 전에 보고해주세요. (나는 “현재 8년된 이 회사에서 단 한번도 이룬 적이 없는 투자금액을 유치하세요”라고 들렸다.)
2번째는 마케팅에서 단순등록 및 경리처럼 루틴한 업무를 하는 보직으로 변경하는 것,
3번째는 권고사직입니다.”
나 : “1번째 전략을 짜기 위한 마케팅 예산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대표 : “기존에 요청드렸던 예산으로 생각해주세요.”
없다.
마케팅 예산은 없는 거다.
기존에도 난 없는 예산으로 최대한의 성과를 내기 위해 노력했고, 실제로 나를 갈아서 짠 마케팅 전략만으로 1년 만에 회원 수를 기존 회원 수 대비 2배 이상 증가시켰고, 필요한 투자금액을 계속 유치시키며 실질적으로 눈에 띄는 성과를 만들어냈다.
3가지 제안 중 1번째 제안은 결국 당장에 할 수가 없는 말도 안되는 제안이었다.
2번째 제안은 당연히 불법이다. 임신을 했기 때문에 창의적인 일을 하지 못하니까 루틴한 다른 직무로 변경하라는 것. 게다가 이 회사에서 계속 마케팅 업무만을 해오던 나에게 다른 일을 하라니
그렇게 나는 대표와의 1대1 미팅을 마쳤다.
퇴근은 이미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일단 집으로 돌아와 나름대로 여기저기 알아보기 시작했다.
맘카페와 네이버 등을 서치해본 결과 매우 흔한 일이고, 방법은 없었다.
그저 뱃속에 있는 아이를 생각해서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고 좋게 좋게 최대한 빨리 회사를 그만두는 방법을 다들 추천했다.
어차피 회사를 계속 다니게 되는 거 자체가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일들의 연속일 테니까! 나를 계속 그만두게 하려고 할 테니까!
그 다음날이 되어서 난 고용노동부에 전화했다.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법적으로는 불법이라고 임신을 이유로 절대 자를 수 없다고 답변을 받았다.
그래서 내가 궁금한 점을 물었다.
“그런데 임신이 이유가 아니라 성과부족으로 인한 권고사직이라고 해도 제가 안 잘릴 수 있는 건가요?”
이 질문에 돌아온 답변은 너무 참담했다.
“회사 내부의 상황은 판단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에 그러한 이유로는 방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임신으로 퇴사를 하라고 하는 건 확실하게 불법입니다.”
정말 무슨 무늬로만 만들어 놓은 법이었다.
그럼 당연히 내가 일을 못해서 자른 거라고 하지 ‘임신해서 자른 겁니다’라고 누가 하겠냐고!
답답한 소리만 듣고 난 다음 다시 대표와의 1대1 미팅을 시작했다. 오늘은 한층 더 무례했다.
대표 : 어제는 제가 3가지 제안을 드렸지만 오늘은 마음을 결정했는데, 권고사직을 하시는 걸로 말씀드려야 할 거 같아요.
나 : 제가 지금 임신한 상황에서 취업이 어려운 건 당연한 거고 그럼 저는 나라에서 주는 육아휴직도 못 받게 되니까, 산전육아휴직으로 해주세요.
대표 : 그건 지금 회사가 어려워서 안될 것 같습니다.
나 : 육아휴직 거절하시는 건가요?
대표 : 네 지금 회사가 어려워서 육아휴직은 해드릴 수가 없어요.
나 : 네 그럼 권고사직 하라는 말씀도 전 거절할 수 있는 걸로 알아서, 저는 거절하겠습니다.
내 말에 당황했는지 이 상황이 본인도 웃겼는지 대표는 모든 멘트 중간중간에 계속 ‘임신한 사람한테 이렇게 스트레스를 주면 안되는데 정말 미안하게 생각한다’면서 더 이상한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대표 : 우리 회사 인사를 담당해주고 있는 플렉스에 이런 분야 담당자와 연결해드릴게요. 그 분과 상담을 해보시고 다시 저한테 결과를 말씀해주세요.
나 : 네, 누구랑 해야할 지 모르겠으니까 연결해주시면 상담해볼게요.
이렇게 마친 두번째 미팅 후 같은 날 세번째 미팅을 시작했다. 이 때부터는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얼마나 알아봤는지 아니 이제야 알아봤는지 갑자기 태도를 바꾸기 시작했다.
대표 : 플렉스에 알아보니 임신한 상황에서 권고사직 문제는 자기네들은 답변해줄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또 제가 좀 더 알아보니 제가 하면 안되는 말을 너무 많이 한 거 같네요.
이게 하면 안되는 말인지 잘 몰랐어요.
우선 정말 죄송하고 이런 상황을 오해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말씀해주셨던 산전육아휴직은 해드릴게요.
이게 법적으로 무조건 해줘야 한다고 하고, 육아휴직 끝나고 난 다음에 권고사직하는 걸로 하면 될 거 같아요.
이렇게 끝나는 거 같았다.
나도 그냥 끝내고 싶었다.
지금 난 너무 임신초기인 상태였고,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았으며, 열심히 일하는 성격상 하루라도 더 이 회사를 위해서 일해주고 싶지 않았다.
대표 : 인수인계는 인수인계서에 작성해서 오늘내로 넘겨주세요. 가능하실까요?
나 : 하루만에는 좀 어려울 거 같은데, 그동안 다 정리는 꾸준히 해놨기 때문에 찾아보면 찾을 수는 있을 거에요. 크게 적어놓을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대표 : 그럼 그렇게 해주세요. 오늘까지로 할게요.
너무 웃겼다. 하지만 알겠다고 했다. 하루만에 작성할 수 있는 내용만 작성하면 되는 거니까, 그리고 난 그날 퇴사했다.
정말 짜증나는 건 그 뒤로 업무 때문에 연락이 오는 건 대표가 아니라 친하게 지냈던 직원들이 미안하다면서 알려달라고 연락오는 거였다.
안 알려줄 수도 없고 진짜 짜증났지만 그래도 남아있는 사람들이 무슨 죄겠는가.
아니다 죄는 죄다. 알면서 나한테 물어보다니...
뭐 사회생활이라는 게 다 그런거니까.
최선을 다해 알려줬다. 잘해보라면서
이렇게 난 임신을 했더니 잘 다니고 있던 회사를 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