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파에세이] 연봉 상위 7%와 천억거지
어제 친애하는 백수 동생이 놀러 와서 아랍인들처럼 집에서 잘 해 먹였더니 동생이 답례로 이렇게 근사한 곳에서 커피를 대접했다.
커피값이 조금 비싸긴 했지만, 이 시간에 유럽 귀족이나 볼 법한 풍경을 보면서 차와 케이크를 먹고 있으니 우리가 정말 부자로 느껴졌다. 이럴 땐 자본주의가 좋아진다.
동생은 백수이긴 하지만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은 아니다. 그래서 돈과 가난과 중산층과 중위소득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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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층 자녀들은 대개 자신들이 얼마나 혜택받은 소수인지 잘 모른다. 그들이 보는 세상은 전부 자신보다 잘 사는 집 아이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통과의례처럼 유학을 가면 한국에 있을 때보다 돈도 더 아껴 써야 하고, 한국에 있을 때보다 더 부유한 집 아이들을 보게 되기 때문에 상대적 빈곤까지 느끼게 된다.
그래서 그 아이들은 부모가 교수라 봤자 세후 2억 정도밖에 못 번다, 식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내뱉는다. 정말 자기 집이 부유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모가 교수라는 것만으로도, 유학을 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얼마나 큰 혜택을 받는 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이 얻 모든 성취를 스스로의 노력의 결과라고 믿는 경우가 많다. 부모가 비싼 과외를 붙여주고, 이곳에서 저곳으로 보내줄 수 있는 환경 자체가 엄청난 혜택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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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만 그런 것은 아니다. 내가 만나본 부자들, 그러니깐 30대에 이미 억 단위 연봉을 벌고, 서울에 자기 집이 있고, 여기저기 땅과 건물을 가진 사람들 중 누구도 자신을 부자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언제나 자기 주변에 더 큰 부자들을 얘기하며 자신의 상대적 가난을 강조할뿐이다.
제일 황당한 경우는 자신을 천억 거지라고 말했던 사람이다. 주변 사람들은 다 1조 클럽에 드는데 자신은 겨우 몇천억만 있다는 이유에서다.
한국인에게 부자라는 개념은 영원히 잡히지 않는 이데아 같은 것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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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도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다. 그러다 어느 친구 집에 놀러 갔는데 스무 평 정도 되는 아파트에 친구네 네 가족이 함께 사는 것을 보고 무척 놀랐다고 했다. 처음엔 친구 아버지가 열심히 일을 안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어서 동생은 더욱 놀랐다고 했다.
그날은, 놀랄 것도 이상할 것도 없는 보통의 삶, 대다수 한국인의 삶을 동생이 처음 본 날일 것다.
동생은 몇 해 전에 아버지를 잃었다. 60대 초반. 돌연한 죽음이었다. 지독한 상실의 슬픔 속에서 동생은 많은 것을, 오래도록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 환경에 있는 다른 아이들은 잘 깨닫지 못하는 것들을 이미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그 연세까지라도 버텨주셔서 무척 운이 좋았다는 것, 더 일찍 아버지를 여읜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다는 것, 그랬다면 평생 가정주부로 살아온 엄마가 식당일이든 청소일이든 해야 했을 거라는 것, 자신과 오빠도 유학은커녕 일찍 생계에 뛰어들어야 했을 거라는 것. 생계 걱정 없이 슬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자신은 굉장히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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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중위소득은 1인 가구 기준 222만 원이고, 연봉 1억은 대한민국 소득 상위 7%가 벌 수 있는 돈이다.
우리 대부분은 거지가 아니고, 우리의 궁상스러운 모습은 보통의 삶의 모습이며, 실은 대부분의 사람은 가난을 경험한 적이 없고, 자신을 부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울하면 만 원짜리 한 장 들고 나가서 초코케이크와 커피를 시켜 마시면서 도서관에서 빌려온 위대한 작가들의 책을 읽으면 된다.
내 보기엔 그게 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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