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2일차.
작년 보성여행에서도 언급했듯 전라도는 허세인들의 도시이다. 허세는 부드러운 거품 같은 것이어서 한두 번 보고 말 사이에서는 관계를 유들유들 부드럽게 해주지만 며칠 더 만날 사이는 조금씩 난감하게 한다.
내 방은 전통 가옥도 아닌데 침대가 없다. (대신 보일러가 짱짱하여 지지는 맛이 일품이긴 하다) 앞 건물 뷰를 가진 놀랍도록 후락한 방인데, 이곳을 예약한 이유는 로비에 마련된 카페가 좋았기 때문이다. 에스프레소가 무상 제공되고 넓고 쾌적하다.
무엇보다 상시 개방된다. 사장님은 밤 10시 이후에 오는 건 좀 그렇지만 새벽에는 ‘아무 때나 와서 원하는 만큼 있어도 상관 없다’고 하셨다. 글을 쓸 사람에겐 방보다 카페이므로 보름 정도 머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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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때나’, ‘원하는 만큼’ 같은 말들이 허세인들의 언어라는 사실을 깜빡했다.
일부러 사람이 없는 아침 7시부터 카페에 나와 있던 건데, 사장님은 내가 진짜 아무 때나 와서 원하는 만큼 있으니 눈에 띄게 초조해하셨다.
전면 유리문도 전부 열고 사나운 개도 로비에 풀어놓고 싶은데, 내가 춥다고 난방기까지 틀고 있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셨던 것. 참고로 오늘 해남 아침 기온은 10도도 안 됐다. 비까지 와서 정말 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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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때 허세인들과 잘 지내는 방법이 있다. 바로 다 터놓고 얘기하는 것.
나는 아침마다 여기서 글을 쓸 거다. 2주 동안 그럴 것이다. 그러려고 여길 왔다. 문을 열고 싶으면 열고, 개를 풀어놓고 싶으면 풀어놓으셔라. 나 개 좋아한다. 근데 춥다. 히터 좀 내주쇼. 내 방요? 거기선 못 쓰지라. 거기서 어찌케 쓰겄소.
결국 사장님은 나를 '여포'와 인사시켰다. 여포는 사나운 개의 이름이고 삼국지의 그 여포에서 따온 게 맞다. 진짜 성질이 고약한 놈인가보다.
그리고 작은 히터도 내주셨다.
그리고 아는 사람이 왔을 때 내 흉도 보셨다. 문도 못 열고 있다고. 그러나 그 정도 험담은 뭐. 나도 sns에 쓰는데.
방금 들어올 때 보니 히터를 아예 내가 앉았던 자리 바로 옆에 놓아두셨다. 내 전용석을 만들어준 것이다.
허세인들은 기본적으로 다정하다. 타인의 불편함을 알고도 못 본 척 지나치질 못한다. 알고보면 좋은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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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먹고 다시 글을 쓰려고 카페를 돌아 다녔으나 유일한 두 개의 카페가 모두 문을 닫았다. 고작 6시였다.
숙소 로비에는 가지 않았다. 저녁은 사장님의 시간. 다른 손님과 깔깔거리며 담소를 나누시는데 괜히 들어가서 초치지 말아야지.
이제 땅끝마을의 생활이 눈에 들어온다. 웬만한 것들은 6시에 종료되고, 그래서 갈 곳 없는 투숙객들은 로비로 와서 커피를 내려 마시고, 사장님은 이때다 하고 다가가 말을 붙이고 수다를 떤다.
그러므로 나도 6시에 일과를 종료하고 9시에 자서 5시에 일어나야지. 6시부터 로비에 앉아 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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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후엔 반도의 끝에 서 있었다.
서해와 남해의 경계에도 서 있었다.
그곳엔 할머니 신이 있었다.
한국의 모든 영험한 곳엔 할머니가 있다.
필명을 노파로 짓기 잘했다. 나도 모든 영험한 곳에 있어야지.
그리고 이곳엔 빵집이 없다. 빵을 먹고 싶으면 버스를 타고 두 시간 반을 달려 해남 읍내로 나가야 한다.
전복밥은 이미 질렸다.
생활이 판에 박히고 지루해질 것 같다.
이런 걸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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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부 2일차
숙소 50,000
땅끝탑 모노레일 6,000
회덮밥 13,000
전복뚝배기 15,000
편의점(주스, 오트밀, 3분카레 등) 1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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