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해남에서는 비가 엄청나게 쏟아졌다. 해안가의 비는 소리부터 남다르다. 귀를 찢는 듯한 귀신 울음소리에 새벽부터 자다가 깼다.
그러나 로비에 앉아서 매섭게 퍼붓는 비를 통창 너머로 보면서 쓰는 시간은 정말 좋았다. 이 무슨 호사인가.
잠시 비가 그쳤을 때 바다로 나가보니 바다와 하늘과의 경계가 손가락으로 문지른 것처럼 흐려져 있었다. 물이 자꾸 넘쳐서 조만간 하늘도 바다가 될 것 같았다.
sun남이는 비오는 날에도 아름답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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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님은 여기가 유배지나 다름없다고 했다. 아무것도 할 게 없다고. 그래서 남자 직원이 안 구해진다고 했다. 남자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게 있는데 여자밖에 없으니 그 점이 어렵다고 했다.
남자가 해야 할 일이라는 걸 뭘까? 생각하고 있는데 사장님이 술 먹은 남자가 새벽에 무단으로 들어와 로비에서 잔 일을 얘기해줬다. 그때 너무 무서웠다고.
그게 사장님이 생각하는 남자가 해야 할 일이었다. 술 먹은 남자한테 추행이나 강간을 당하지 않을 일.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런데 만일, 술 먹은 남자가 게이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게이가 해남 땅끝마을까지 와서 모텔 로비에서 무단으로 노숙하다가 남자 직원을 강간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아무래도 그런 일은 이성애자 남자들이나 하는 짓이지. 남자가 한 명 있는 게 낫겠네...하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런데 이번엔 그 남자가 술 먹고 그러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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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 색 등산 자켓을 입고 다니는데, 카페나 식당에 앉아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고 있으면 손님들이 나한테 와서 주문을 한다.
어제는 할머니가 계산해 달라며 카드를 줬고, 오늘 오후엔 한 중년 남자가 "라떼 하나 달라니까?"라고 했다.
아까 말했는데 내가 씹었나 보다. 말을 그따위로 하니까 씹히지. 다시 가만히 앉아 말을 씹고 있으니까 옆에 있던 사람이 당황한 남자에게 “사장은 이짝이여”하며 바르게 지목해줬다.
아무래도 오렌지 색 등산 자켓이 여사장 룩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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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었어? 죽었어. 먼저 가부렀어? 에헤이.
지인의 죽음에 대한 노인들의 대화는 오싹할 정도로 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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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해양자연사박물관에 갔다. 아무도 찾지 않는 박물관의 직원은 나의 방문을 진심으로 반겨줬고, 나는 환대 속에서 뼈와 사체로 가득한 경내로 홀로 들여보내졌다.
그럭저럭 신기하고 재밌었다. 애들은 무척 좋아할 것 같다.
천장에 매달린 거대한 대왕고래 뼈를 보니 <진격의 거인>의 에렌 예거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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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평점이 굉장히 낮은 식당에 가서 매생이 전복을 먹었다. 저번에도 한 번 왔었는데, 평점을 그렇게 박하게 줄 정도로 음식을 못하는 집은 아니었다. 실은 굉장히 잘하는 집이다.
그런데 한 번 가면 두 번 가고 싶진 않아진다. 직원들이 친절하지 않아 계산하고 나오면서부터 기분이 나빠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직원의 친절도 맛으로 평가하기에 불친절한 집은 음식을 잘해도 맛없는 집이 된다.
그러나 나는 이들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주고 싶었고, 낙동강 녹조 물을 퍼다 놓은 생김새에 역시.. 했으나, 한술 뜨는 순간 역시 맛있다고!로 바뀌었다.
미역국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부드럽고 풍부한 맛이었고, 전복은 크고 우람했다. 이 맛있는 걸 왜 이제 먹었지? 하며 순식간에 그릇을 남김없이 비웠다.
그리고 계산하는 순간 다시 역시...했다. 역시, 친절은 맛으로 환산하는 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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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부 4일차
숙소 55,000
고구마라떼+붕어빵+커피빵 11,500
매생이전복 15,000
계란, 초콜렛, 두유 등 13,800
땅끝해양자연사박물관 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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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 4일 차
다리 들어 올리기 108번
스쿼트 230번
걷기 13000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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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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