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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에세이] 구례 2일 차(여행 27일 차)

화엄사, 천은사, 연기암, 그리고 구례 맛집들

by NOPA


20250531 구례 2일 차(여행 27일 차)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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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밤을 보냈다. 여행의 대미를 지리산으로 장식하려고 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했다. 사장이 여행가로 유명한 사람이라고 했다.


아무도 없는 4인실에서 혼자 자다가 온몸이 간지러워 잠을 깼다. 눈에 보이는 건 없는데 소름이 끼치도록 간지러워 밤새 몸을 벅벅 긁었다.


저녁에 숙소에 와서 침대에 앉자마자 다시 몸이 간질거렸다. 침대 틀과 창틀을 휴지로 훑어보았다. 아주 작은 벌레들이 휴지 위를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질이 나쁜 목재로 가구를 만들 때 보이는 벌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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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차하면 서울로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짐을 싸서 사장님한테 갔다. 벌레 영상을 보여주며 저 침대가 없는 방으로 바꿔달라고 했다. 그렇게까진 해주지 않았다. 그건 비싼 방이기 때문이다. 대신 창틀에 벌레가 없는 다른 방으로 바꿔줬고, 2층 벽 쪽 침대를 쓰면 더 나을 거라고 해서 그렇게 했다.


실제로 어제보단 나았다. 대신 창가 쪽 1층 침대에 자리 잡은 다른 여행객이 밤새 자신의 몸을 긁고 찰싹찰싹 때리는 소리를 죄책감 갖고 들어야 했다. 내 몸 하나 편하자고 사장과 한통속이 되다니. 나쁜 년.


많은 싸구려 숙소를 다녀본 사람으로서 여긴 확실히 관리가 잘 되는 곳이 아니었다. 숙소 사장님이 책 쓰느라 바빠서 그다지 공들여 관리하지 않는 듯했다.


남의 영업장에 안 좋은 소리를 할 수 없으므로 숙소 이름은 밝히지 않겠으나, 나중에 지리산 가실 분들은 따로 물어보면 알려드리겠습니다. 거기까지 가서 밤새 벌레로 고생하면 안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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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숙소는 벌레만 많은 게 아니라 위치도 좋지 않았다. 남들처럼 편하게 성삼재까지 버스 타고 가서 설렁설렁 노고단을 오르려 했더니 버스를 한 번 갈아 타야 했다. 산골에서 버스를 갈아타는 길을 시간 내에 왕복하려면 천운이 따라야 한다.


나는 운이 없었다. 50분을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는 버스를 포기하고 화엄사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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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 정류장에서 내리려는데 내 뒤에서 따라 내리던 아저씨의 카드가 먹히지 않았다. 구례 버스는 까다롭기 그지없어서 아무 카드나 먹지 않는다. 도시 사람이 분명한 40대 후반의 남자는 몹시 당황해하며 기사에게 계좌이체를 해주겠다고 했다. 뭔 놈의 계좌이체.


제가 내드릴게요.


호쾌하게 카드를 들이댔다. 4천 원이나 나왔다. 쉬벌, 천 원일 줄 알았지.


아저씨가 너무 미안해하며 계좌이체를 해주겠다고 했다. 그놈의 계좌이체. 민폐 끼치는 걸 도무지 못 견뎌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한테 4천 원 쓰는 건 아깝지 않지. 그리고 나도 처음 구례에 왔을 때 누군가에게 버스 빚을 진 일이 있기 때문에 지금은 내가 낼 차례였다. 이것은 오늘 우주가 그대에게 주는 행운. 기쁘게 받으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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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고단을 못 간 대신 천은사도 구경했고, 6월의 화엄사 홍매화도 봤고, 3월에 가지 못했던 연기암도 갔다.


연기암에서 내려오는 길엔 한 여인을 살려줬다. 여인은 여기서 연기암이 머냐고 내게 물었고, 나는 여인의 착장이 바르지 않다며, 그 치마, 그 샌들로는 아주 힘들 거라고 말해주었다. 이미 지쳐있던 여인은 바로 남자친구에게 도망가자고 했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화엄사에서 연기암까지 올라가는 길은 굉장히 좋은데, 치마에 샌들로 갈 수 있는 곳은 아니다. 벌레가 떼로 달려들 것이고 돌길은 계곡물에 젖어 있어 미끄럽다. 꼭 그 길이 아니더라도 지리산 어느 길도 그 복장으로 다니면 괴롭다. 반드시 운동화를 신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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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은사 보제루와 화엄사 홍매화


#3

마지막 날. 아침 8시부터 4시간 동안 구례 읍내에서 맛있다는 것들로 배를 가득 채운 다음(가마솥머리국밥(진짜 맛있음)-목월빵집(워낙 유명)-오차커피공방(정말 좋음)-지리산오여사(괜찮았음)) 마지막 한 시간은 무얼 할까 하다가 섬진강에서 남도의 태양을 잔뜩 받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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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에 이미 땀으로 샤워한 것처럼 몰골이 우습게 됐다. 그래, 이게 남도의 여름이지! 나를 아주냥 불태워버려라!


남도의 해와 정기를 가득 받고 거지꼴로 서울로 갔다. 서울 사람들의 얼굴은 허옇고 그렇게 마른 기침을 해댔다. 그리고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집에 와서 재보니 내 가방 무게는 7.5킬로였고 나는 한 달 만에 3킬로가 쪄 있었다. 고3 이후 처음 보는 몸무게였다.

KakaoTalk_20250601_230735165_21.jpg?type=w1 이 다리를 건너면 남도의 태양을 초과한도로 받을 수 있다

**

가계부 27일 차

숙소 25,000

김밥, 샌드위치 등 15,600

고구마라떼 5,000

비빔밥 12,000

대추차 7,500


가계부 28일 차

내장탕 8,000

비엔나 커피 6,000

호박빵, 바게뜨 11,500

농어돈까스 15,000

***

운동 27일 차

다리 들어 올리기 108번

걷기 26,000보


운동 28일 차

다리 들어 올리기 108번

걷기 13,000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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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차커피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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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

https://blog.naver.com/nopanopanopa/223883234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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