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흥사 연리근, 두륜산 케이블카, 그리고 고양이
250524 해남 20일 차.
#1.
해남에 가면 가장 보고 싶었던 걸, 오늘에야 보았다. 대흥사 연리근. 뿌리가 붙은, 500년 된 느티나무다.
너무 신기해서 앞에서 봤다가 뒤에서 봤다가 옆에서 봤다가 다시 또 앞에서 한참을 봤다. 슬그머니 만져보기도 했다. 돌 같았다.
그래, 이 정도는 돼야 어디다 자랑할 만하지, 땅끝마을 연리지는 정말 비루했다고.
500년 동안 산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누가 옆에 와서 꽉 붙어버리면 덜 외롭나?
그치만 붙어서 하나가 되는 순간 또다시 혼자가 되는 건데?
시간도, 규모도, 하는 짓도 나의 이해 범위를 한참 넘어선 존재가 눈앞에 서 있었다. 거대한 석상처럼.
#2.
누가 닳아 빠진 고양이 인형을 버린 줄 알고 사진을 찍었다. 인형이 고개를 들었다. 죽어가는 고양이였다. 생애 마지막 순간을 대흥사 주차장 한구석에서 마치는 중이었다.
숨 쉬는 것도 힘겨워하는데 나 때문에 경계 하느라 고개를 들었다. 미안해서 얼른 사라졌다. 돌아가서 물이라도 줄까, 했는데, 역시 성가셔할 것 같았다.
땅끝마을의 참새처럼 가장 찬란한 순간에 돌연사로 즉사하는 게 나을까, 주차장에 버려진 인형처럼 누워 마지막 숨까지 고통받다가 죽는 게 나을까.
모르겠다.
참새는 서늘했고, 고양이는 쓸쓸했다.
부디 단숨에 가거라. 그리고 두 번 다시 몸에 갇히지 말기를.
#3.
두륜산 케이블카.
해남의 영산이라는 두륜산을 왔는데, 봉우리 딱 한 개만 올라가 보자, 하고 있었는데 마침 봉우리 딱 한 개를 오르는 케이블카가 있었다.
기가 막혔다.
걸어가면 대여섯 시간은 잡아야 했을 텐데, 8분 만에 올라왔다. 이래서 차 타면 걷는 사람이 멍청해 보인다는 거구나.
8분 만에 올라 30분 사진 찍고 다시 8분 만에 내려갔다. 그 순간엔 그토록 감탄했는데, 지금은 내가 오른 봉우리 이름도 기억이 안 난다.
엊그제 오른 도솔암은 온도 습도 냄새까지 다 기억난다.
자, 이제 누가 진짜 멍청이지?
#4
두륜미로파크
애들 가는 데라고 우습게 여기고 들어갔다가 정말 살려주세요 소리가 턱끝까지 올라왔다.
길치는 절대 들어가지 마라. 하도 길이 안 나와서 덤불 두 개를 그냥 힘으로 뚫고 나왔다.
#5.
오늘의 식사
보리밥 정식이라고 해서 우습게 여기고 들어갔다가 위장 터질 뻔했다. 너무 맛있고, 너무 싱싱하고, 너무 많다. 고기도 그릴에 구워서 나오는데 다해서 12,000원!
내 뒤에 올 혼밥 손님들이 괄시당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먹었더니 사장님이 정말 기뻐하셨다. 계산할 때 몹시 흡족한 얼굴로 “우리 아가씨, 진짜 많이 드셨네이”하셨다.
아가씨는 아니지만 나도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나왔다.
내일 또 등짐 메고 6시간 트래킹 할 거라 오늘 최선을 다해 먹어 두었다.
#6.
두륜산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원래 하루 더 있으려고 했는데, 이번에 묵은 숙소는 방 청소 서비스를 해준다는 것을 방금 알았고, 그래서 내가 간밤에 빨고 잘 마르라고 펼쳐놓은 속옷과 면 생리대를 청소하는 사람이 다 보았고, 근데 그 청소하는 사람이 환갑 줄의 남자 사장님이어서 나는 어서 도망치기로 했다.
죄는 없으나 별로 당당해지지가 않아서 나는 가네. 그대가 두 번 다시 나를 볼 수 없는 곳으로.
**
가계부 20일 차
숙소 50,000
커피콩+라떼 11,000
보리비빔밥 정식 12,000
김부각 5,000
블루베리 요거트+ 당근케이크 12,000
두륜산 케이블카 1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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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 20일 차
다리 들어 올리기 108번
스쿼트 80회
걷기 24,000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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