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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에세이] 해남 17-18일 차.

도솔암 갔다가 죽었다. 이건 영혼이 쓰는 글

by NOPA


20250521 해남 17일 차


#1.

목포 사는 친구가 오후에 잠깐 놀러 왔다. 친구를 데리고 모노레일도 타고 진솔이네도 갔다.


오며 가며 나에게 말을 건네고 농을 던지던 아저씨들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진솔 씨도 입 꾹 닫고 식사만 날랐다. 이럴 수가 있나! “친군가 봐요” 한 마디 정도는 할 수 있는 사이 아니었나? 나는 몹시 서운했다.


친구가 노안이고 교도소에서 갓 출소한 것처럼 생기긴 했지만 영혼만큼은 누구보다 순수한 아이인데,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다니! 어르신들 왕실망!


친구는 사오라는 5천 원짜리 다이소 초경량 우산은 안 사오고(이것은 오늘 비극의 단초가 됐다) 케이크만 사 와서 저녁에 숙소 사장님과 둘이 나눠 먹었다. 덕분에 사장님과 17일간의 귀한 인연을 잘 마무리 했다.


**

가계부 17일 차

숙소 55,000

매생이전복+멍게해삼 45,000

커피 5,000

모노레일 9,000


***

운동 17일 차

다리 들어 올리기 216번

걷기 8,000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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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22 해남 18일 차


#1.

땅끝마을을 떠났다. 버스 정류장에 할머니가 오시길래 괜히 말을 붙여 보았다. 알고 보니 보물섬 횟집 1대 사장이자 지금 사장님의 작은 어머니셨다. 보물섬 집안 사정을 속속들이 알게 됐다. 사실 잘 모른다. 사투리를 잘 못 알아 들었기 때문이다.

1.jpg?type=w1 토문재. 자판기로 판매하는 카페가 있음


#2.

오늘의 목적지는 도솔암-미황사였다. 땅끝탑에서 산길을 통해 가는 길이 있는데, 멀지 않은 곳에 인송문학촌 토문재라는 곳이 있어 거길 들렀다 가기로 했다.


잘못된 판단이었다. 거기서 가는 길은 순 아스팔트 길이었고 오늘은 날씨가 너무 좋았다.


태양이 자오선을 지날 때 남도의 아스팔트 길을 걸으면 손부채를 어느 방향으로 가져다 대든 그늘이 생기지 않는다.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발끝만 보고 걸어야 얼굴이라도 자외선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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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 길이 좀 보소


대신 목덜미가 고스란히 햇볕에 노출돼 붉게 달궈진다. 너무 뜨거워 어디서 구한 종이 팜플렛으로 목덜미를 가린 채 발끝만 보며 걸었다. 그래도 아스팔트 열기는 막을 수 없었다.


그 상태로 한 시간쯤 걸으니 머리는 방금 감고 나온 것처럼 땀으로 젖고, 길섶에 풀잎들은 노래방 미러볼처럼 현란하게 반짝이기 시작했다. 환각 증세였다. 걸음을 멈춰야 했는데 그늘이 없었다. 아무리 걸어도 그늘이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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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뒤에서 느린 속도로 차가 따라붙었다. 그러더니 내 옆에서 창문을 내리고는 “저기요”하고 불렀다. 동네 이장이라고 했다. 이장이고 나발이고 간에 날 좀 죽여줘, 라고 생각하는데 그가 조수석에 놓인 챙 넓은 등산 모자를 건넸다.


“이 날씨에 모자도 안 쓰고 걸어가면 큰일나요”


웬만하면 한 번은 사양했을 텐데, 냉큼 받았고, 돌려주겠다는 말도 안 나왔고, 그저 배꼽 인사만 했다. 이장은 잠시 보더니 더 하고 싶은 말을 꾹 삼키고는 유턴해서 내려갔다.


웬 미치광이가 이 날씨에 모자도 안 쓰고 걸어가는 걸 보고 저러다 장사 치르겠다, 싶어서 따라온 것 같았다.


우주가 나를 살리려고 보낸 귀인이었다. 모자 하나에 정말 세상이 달라졌다. 풀잎은 더 이상 반짝반짝 춤추지 않았고, 찜솥 같던 콧김도 잠잠해졌다.


KakaoTalk_20250522_222312085_08.jpg?type=w1 자세히 보면 성함과 전화번호 써 있음. 무척 아끼는 모자인 것! 감사합니다ㅠ

#

내가 4시간 동안 사투를 벌이며 아스팔트 길을 올라갈 때 사람들은 차를 타고 씽씽 올라갔다. 도솔암의 풍경을 보고 나는 거의 울었고, 사람들은 안 울었다.

차 타고 30분 만에 올라온 것들이 뭐슬 알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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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아까워 한 걸음도 쉽게 떼지 못했고, 시선을 돌리는 곳마다 펼쳐지는 장관에 숨도 제대로 못 쉬었다. 사람들은 이미 도솔암을 돌고 내려오고 있었다.

느그들이 뭐슬 알겄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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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자에서 정성껏 삼배를 했고, 시주도 했고, 참선도 했고, 내려오는 길에 한국인의 밥상 촬영팀과 마주쳐서 이것저것 구경도 했다.

느그들, 도솔암이 뭔지는 알고 찍는 거시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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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황사는 못 갔다. 포기가 빠른 편이다.

가방은 무겁고 다리는 더 무거워서 내려가는 길도 4시간 걸렸는데, 할머니들이 불러서 갔더니 수박을 주셨다. 40년 동안 먹은 수박 중 제일 달콤했다.

확실히 우주는 나를 살리고 싶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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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묵은 읍내의 숙소는 에이즈 걸릴 것처럼 생겼다. 드럽고 냄새나고 여기저기 담배빵이 뚫려있다.


방금 전까지 신선계에 있었는데.

우주가 날 어떻게 살려놨는데.

드런놈들.

너무 빨리 속세로 던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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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계부 18일 차

숙소 50,000

이것저것 먹음 40,000


***

운동 18일 차

다리 들어 올리기 108번

걷기 36,500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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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

https://blog.naver.com/nopanopanopa/223872229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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