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자에겐 수치형을
두 번째 취미를 만들었다. 북한산 둘레길 걷기!
원래는 고양누리길 1번 코스가 북한산 주변이어서 도장이나 찍으러 갔는데, 막상 가보니 고양 누리길보다 서울시의 ‘북한산 둘레길’ 코스가 훨씬 좋아 보였다. 그래, 북한산 한바퀴는 돌아줘야지 걷는 것 같지.
그럼에도 어떻게든 북한산 지분을 주장하기 위해 서울시 게시판 사이에 코딱지만 한 고양 누리길 스탬프 박스를 세워둔 걸 보니 참 애잔해 보이기도 하고, 독버섯 같아 보이기도 했다.
독버섯 힘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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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산에 가면 일곱, 여덟 시간은 산에서 논다. 두륜산에 갔을 땐 아침 6시 40분에 숙소를 나서서 오후 5시 50분에 돌아왔다.
11시간 중 산에 머문 시간은 8시간 정돈데, 그 동안 노승봉에서 가련봉, 두륜봉으로 이어지는 봉우리 세 개를 올랐고, 정상에 오를 때마다 너럭 바위에 앉아 초콜릿을 먹었고, 눈 앞에 펼쳐진 장관을 보며 멍을 때렸고, 뒤를 돌아 내가 지나온 능선도 한참을 보았다.
또 바위 절벽 위에 매달린 손잡이를 보며 성범죄자들을 발가벗겨 저기에 매달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등산객들이 지나갈 때마다 그의 죄 많은 육신을 나뭇가지로 콕콕 찌르며 키들키들 웃는, 이름하여 수치형을 받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했다.
수령이 최소 천 이백 년이라는 나무를 만나면 그 밑에 자리를 잡고 앉아 전투식량을 먹으며 통일 신라 시대부터 살았을 나무의 시간을 생각하고, 남미륵암 돌부처님을 보면 앞에서 잠시 좌선을 하고 암자에 메어 놓은 개도 구경한다.
그렇게 주변 오만 것들에 참견하느라 산에 한 번 가면 8시간씩 있는다. 자연히 걸음이 느릴 수밖에 없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추월해간다. 모두에게 길을 내어주며 나는 부지런히 눈을 굴린다. 가장 느리고 진하게 산과 교감하는 나만의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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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산은 그렇다는 것이다. 아는 산은 다르다. 북한산은 아는 산이다. 이미 저 방법으로 열 번도 넘게 올랐고, 그 중 한 번은 비오는 날에 올랐다가 길을 잃는 바람에 네 발로 바위를 기어다닌 적도 있다. 그만큼 진하게 교감한 산이다.
그런 산에서는 나도 아저씨들처럼 등산한다. 좌우 안 보고 불붙은 것처럼 돌진한다는 뜻이다. 앞에서 스틱 짚어가며 신중하게 걷는 남녀노소 모두에게 꺼지라고, 북한산 날다람쥐 앞길 막지 말고 전부 꺼지라고, 속으로 오만 욕을 해가며 번개처럼 산을 올랐다.
그러나 잘난 척은 2km 지점, 딱 보리사까지만이다. 그 위로는 무념의 구간. 특히 북한산 정상은 악랄하기 이를 데 없다. 무슨 프랑켄슈타인 얼굴의 꿰맨 자국을 오르는 듯하다.
정상부근은 상당히 험해서 사망 사고도 잊을만하면 일어나는데, 당장 이번 5월에도 인수봉에서 실족사고가 두 번이나 있었다. 그러나 암벽만 안 타면 그렇게 위험한 산은 아니니, 잘난척하지 말고 천천히 오르면 된다.
그러나 오늘은 옷을 제대로 갖춰 입지 않았으므로 딱 잘난 척 지점까지만 오른 후 덕암사(아미타사)라는 예쁜 절을 구경했다.
원효대사가 수행한 바위굴이라는데, 웬만한 절들은 다 원효대사가 수행한 절이라고 하니 정확한 진위는 알 수 없으나 바위굴 안에 절이 담긴 모양은 무척 독특하고 예뻤다.
법당 위쪽으론 삼성각이 있는데, 그곳에 오르자 한눈에 펼쳐진 북한산 일대 모습에 잠시 숨이 멎었다.
매번 백운대만 보고 가느라 이쪽은 와볼 기회가 없었는데, 제대로 준비하지 않고 산을 오르니 이런 선물을 받았다. 이런 걸 보면 꼭 준비된 삶에만 좋은 게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앞으로도 자주 옆길로 새야지.
요즘 강의준비만 하고 글은 안 쓴다. 강의준비는 싫지만, 평소에 읽지 않던 책들을 읽는 것은 좋다. 그 책들을 들고 틈만 나면 집 밖을 나간다.
읽다가, 걷다가, 걷는 동안 실컷 군것질을 하다가, 돌아와서는 보고 느낀 것들을 곰곰이 곱씹는다. 내일은 어디 갈지를 고민한다. 일산에서는 길어야 30분만 기다리면 버스가 오는 것도 좋다(해남은 길면 두어시간 기다려야 한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오늘도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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