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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에세이] 산행을 8시간 하는 이유

성범죄자에겐 수치형을

by NOPA

두 번째 취미를 만들었다. 북한산 둘레길 걷기!


원래는 고양누리길 1번 코스가 북한산 주변이어서 도장이나 찍으러 갔는데, 막상 가보니 고양 누리길보다 서울시의 ‘북한산 둘레길’ 코스가 훨씬 좋아 보였다. 그래, 북한산 한바퀴는 돌아줘야지 걷는 것 같지.


그럼에도 어떻게든 북한산 지분을 주장하기 위해 서울시 게시판 사이에 코딱지만 한 고양 누리길 스탬프 박스를 세워둔 걸 보니 참 애잔해 보이기도 하고, 독버섯 같아 보이기도 했다.

독버섯 힘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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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산에 가면 일곱, 여덟 시간은 산에서 논다. 두륜산에 갔을 땐 아침 6시 40분에 숙소를 나서서 오후 5시 50분에 돌아왔다.


11시간 중 산에 머문 시간은 8시간 정돈데, 그 동안 노승봉에서 가련봉, 두륜봉으로 이어지는 봉우리 세 개를 올랐고, 정상에 오를 때마다 너럭 바위에 앉아 초콜릿을 먹었고, 눈 앞에 펼쳐진 장관을 보며 멍을 때렸고, 뒤를 돌아 내가 지나온 능선도 한참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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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바위 절벽 위에 매달린 손잡이를 보며 성범죄자들을 발가벗겨 저기에 매달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등산객들이 지나갈 때마다 그의 죄 많은 육신을 나뭇가지로 콕콕 찌르며 키들키들 웃는, 이름하여 수치형을 받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했다.

KakaoTalk_20251102_192635874_08.jpg?type=w1 수치형이 있다면 쉽사리 화장실 벽에 구멍을 뚫지 못하겠지

수령이 최소 천 이백 년이라는 나무를 만나면 그 밑에 자리를 잡고 앉아 전투식량을 먹으며 통일 신라 시대부터 살았을 나무의 시간을 생각하고, 남미륵암 돌부처님을 보면 앞에서 잠시 좌선을 하고 암자에 메어 놓은 개도 구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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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주변 오만 것들에 참견하느라 산에 한 번 가면 8시간씩 있는다. 자연히 걸음이 느릴 수밖에 없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추월해간다. 모두에게 길을 내어주며 나는 부지런히 눈을 굴린다. 가장 느리고 진하게 산과 교감하는 나만의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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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산은 그렇다는 것이다. 아는 산은 다르다. 북한산은 아는 산이다. 이미 저 방법으로 열 번도 넘게 올랐고, 그 중 한 번은 비오는 날에 올랐다가 길을 잃는 바람에 네 발로 바위를 기어다닌 적도 있다. 그만큼 진하게 교감한 산이다.


그런 산에서는 나도 아저씨들처럼 등산한다. 좌우 안 보고 불붙은 것처럼 돌진한다는 뜻이다. 앞에서 스틱 짚어가며 신중하게 걷는 남녀노소 모두에게 꺼지라고, 북한산 날다람쥐 앞길 막지 말고 전부 꺼지라고, 속으로 오만 욕을 해가며 번개처럼 산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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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에게는 욕하지 않는다. 고양이는 귀여우니까.


그러나 잘난 척은 2km 지점, 딱 보리사까지만이다. 그 위로는 무념의 구간. 특히 북한산 정상은 악랄하기 이를 데 없다. 무슨 프랑켄슈타인 얼굴의 꿰맨 자국을 오르는 듯하다.


정상부근은 상당히 험해서 사망 사고도 잊을만하면 일어나는데, 당장 이번 5월에도 인수봉에서 실족사고가 두 번이나 있었다. 그러나 암벽만 안 타면 그렇게 위험한 산은 아니니, 잘난척하지 말고 천천히 오르면 된다.

%EC%A0%9C%EB%AA%A9_%EC%97%86%EC%9D%8C.jpg?type=w1 북한산 정상

그러나 오늘은 옷을 제대로 갖춰 입지 않았으므로 딱 잘난 척 지점까지만 오른 후 덕암사(아미타사)라는 예쁜 절을 구경했다.


원효대사가 수행한 바위굴이라는데, 웬만한 절들은 다 원효대사가 수행한 절이라고 하니 정확한 진위는 알 수 없으나 바위굴 안에 절이 담긴 모양은 무척 독특하고 예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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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당 위쪽으론 삼성각이 있는데, 그곳에 오르자 한눈에 펼쳐진 북한산 일대 모습에 잠시 숨이 멎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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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백운대만 보고 가느라 이쪽은 와볼 기회가 없었는데, 제대로 준비하지 않고 산을 오르니 이런 선물을 받았다. 이런 걸 보면 꼭 준비된 삶에만 좋은 게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앞으로도 자주 옆길로 새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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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강의준비만 하고 글은 안 쓴다. 강의준비는 싫지만, 평소에 읽지 않던 책들을 읽는 것은 좋다. 그 책들을 들고 틈만 나면 집 밖을 나간다.


읽다가, 걷다가, 걷는 동안 실컷 군것질을 하다가, 돌아와서는 보고 느낀 것들을 곰곰이 곱씹는다. 내일은 어디 갈지를 고민한다. 일산에서는 길어야 30분만 기다리면 버스가 오는 것도 좋다(해남은 길면 두어시간 기다려야 한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오늘도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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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읽는 책과 오늘의 군것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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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

https://blog.naver.com/nopanopanopa/2240614587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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