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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박씨 Dec 30. 2023

그리운 메이 아줌마처럼 살고싶다

브런치의 글을 훑어보다가 눈에 들어온 글이 있었다.


'내가 바라는 나, 남들이 바라보는 나, 내가 보는 나'가 존재하고 이 간극이 클수록 자존감은 낮다는 말. 심리학 개론 정도의 책을 읽었던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던 말일 텐데, 이 부분을 그냥 넘기지 못하고 글을 읽었다.


내가 보는 나와 남들이 보는 나는 어떨까? 처음에 많이 듣는 말은 성격 좋다, 편안하다,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 웃음이 많다, 고 좀 더 친해지면 깊다, 예민하다는 말도 듣는 것 같다.


내 일기장을 보며 내가 보는 나는, 화와 짜증이 많다, 인내심이 없다, 살림을 싫어한다, 욕심이 많다, 질투가 많다, 아이들과 잘 놀아주나 긴 시간은 힘들다, 사람들을 좋아한다, 꿈꾸길 좋아한다, 정도다.


역시, 간극이 크다. 겹치는 부분도 있지만 대체로 나는 자존감이 낮겠구나 싶다. 많이 성장했다고 생각했는데 깊숙한 어딘가는 그대로구나 싶었다. 원부모에게 들었던 말들이, 원부모가 나를 보는 시선이, 왜곡된 거울을 만든다고 했는데, 부모님의 시선은 사실 그랬다.


감정에 예민하고, 게으른 아이.


이 시선이 지금 내가 나를 보는 프레임이 되었다. 더 끔찍한 것은 내가 낳은 둘째에게도 같은 시선을 던지고 있다는 것이다. 유독 힘든 딸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그런 딸이었나 보다. 물어보면 엄마는 제일 순한 아이였다고 했는데, 엄마가 했던 말과 내가 느끼는 시선은 달랐던 것 같다.


둘째는 나처럼 밖에서는 '혼나지 않는 귀여운 아이'로 지내는 듯했다. 물어보면 그렇게 말해주었다. 선생님한테 혼난 적이 없고, 친구들이 귀엽다고 한다고. 타인의 시선에 벌써부터 많은 신경을 쓰는 자존감 낮은 아이가 되었을까, 걱정이 되었다.


어떻게 이 시선을 바꿀 수 있을까.


꾸물대는 이유는 분명히 있으니, 생각이 끝나면 하나씩 움직여보라고 해주면 될까?(내가 꾸물댈 때는 해야 할 일이 턱없이 많을 때, 몸이 너무 힘들 때다.)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은 좋아하는 일과 다르고,

그 일을 오롯이 해나가는 것은 당연히 쉽지 않은 일이니, 천천히 하라고, 기다려주겠노라고, 말해주면 될까?


욕심이 많다는 건 해내고 싶은 일, 하고 싶은 일, 꿈이 많다는 것이니, 잘 다듬어 보라고, 응원해 주면 될까?


감정에 예민하다는 건 자신의 마음도, 타인의 마음도 들여다볼 수 있는 귀한 자산이라고 인정해 주면 될까?


내가 바라는 나는 [그리운 메이 아줌마]의 '메이 아줌마'데, 자꾸만 나에게도 아이에게도 부정적인 시선과 모진 말로 상처 입힌다. 잘못되고 부끄러운 모습은 엄마인 나에게 말할 수 없게끔, 아이들을 몰아붙인다. 그리고 나에게도.


25p

나는 메이 아줌마처럼 좋은 사람은 보지 못했다. 오브 아저씨보다도 훨씬 좋았다. 아줌마는 오직 사랑뿐인 커다란 통 같았다. 오브 아저씨와 내가 몽상에 빠져 헤매고 다닐 때도, 아줌마는 항상 이 트레일러에서 우리가 돌아와 아늑하게 쉴 수 있도록 집을 지키고 있었다.

아줌마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했고, 누가 어떻게 행동하든 간섭하지 않았다. 아줌마는 만나는 사람 하나하나를 다 믿었고, 그 믿음은 결코 아줌마를 배신하지 않았으니까. 아마도 사람들은 아줌마가 자신들의 좋은 면만 본다는 점을 알고, 아줌마에게 그런 면만 보여 줌으로써 좋은 인상을 남기려고 했던 모양이다.

오브 아저씨도 온종일 바람개비나 만지작거리는 해군 출신의 상이군인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나도 몇 년 동안 이 집 저 집 떠돌아다닌 고아라는 사실이 부끄럽지 않았다. 아줌마는 아저씨와 나의 자랑이었다.


누가 와도 자신이 부끄러워지지 않게 해주는 존재.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질 수 있도록 자유를 주는 존재, 좋은 면만 봐주고 드러내주는 존재. 믿어주는 존재. 언젠가 천국에 갔을 때 그리워할, 메이 아줌마처럼 그런 사람이고 싶다. 가 가야 할 이상향이다.


75p

아줌마는 언제나 특이한 사람들, 얼핏 보아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사람들을 무척 좋아했다. 천국에서도 아줌마는 그런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을 것이다. 천국은 누구나 자유롭게 살아가는 곳일 테니까. 땅 위에서처럼 꼭 보통사람들처럼 행동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적어도 그것은 천국에서 누릴 수 있는 복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사람의 행동양식은 다양하고, 더 다채로운 사고방식이 있는데, 나의 부모는 정형화된 틀로 생각하고 욱여넣었다. 일찍 일어나야 잘 산다, 바로바로 정리해야 잘 산다, 착해야 잘 산다, 베풀어야 잘 산다. 정작 본인들 앞가름도 제대로 못했으면서 자식들에게 가닿지 못할 의무만 쌓아 주었다. 엄마 자신에게도 그렇게 가혹하니, 엄마의 삶은 말해야 무엇하리. 


알면서도 엄마의  행동 그대로  아이들에게 대물림해주고 있다. 우리 부모님은 잘살기 바라서 다그쳤지만, 나는 내 몸이 힘들어서 다그친다. 내 몸만 버틸 수 있다면 기다려줄 수 있을 것도 같다. 보고 배운 대로 자란다는 옛말이 틀린 게 하나 없다. 들어오는 자극을 습관대로 처리한다. 화내거나 울거나.


그래도 위안삼자면, 알아차리고 있다는 것. 나의 생각과 행동에 실수가 있음을 인정하고, 아이들에게 사과를 구한다는 것.




​115

한때는 왜 하느님이 너를 이제야 주셨을까 의아해하기도 했지. 왜 이렇게 다 늙어서야 너를 만났을까? 나는 집 안이 좁을 만큼 뚱뚱한 데다 당뇨병으로 고생하고 있고, 아저씨는 해골처럼 삐쩍 마르고 관절염까지 앓고 있으니 말이야. (중략)
 하느님은 우리 마음이 더욱 간절해지길 기다리신 거야. 아저씨와 내가 젊고 튼튼했으면 넌 아마도 네가 우리한테 얼마나 필요한 아이인지 깨닫지 못했을 테지. 넌 우리가 너 없이도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겠지.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가 늙어서 너한테 많이 의지하고, 그런 우리를 보면서 너도 마음 편하게 우리한테 의지할 수 있게 해 주신 거야. 우리는 모두 가족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들이었어.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꼭 붙잡고 하나가 되었지. 그렇게 단순한 거였단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데, 기독교 식으로 얘기하자면 '하나님의 섭리'다. '예비하심'이다. 내가 어느 곳에서 기쁘고 달란트를 발휘할 수 있는지 알아보게 해 주시는 때, 내 치부를 딛고 일어나 '사랑받는 존재'로 나아가 '사랑하는 존재'로 나아가게 해 주시는 때, 그 적절한 타이밍이 반드시 있음을 믿는다.


서툴지만,

바라봐 줄게.

기다려 줄게.

응원줄게.

어떤 모습이라도 사랑할게.

있는 모습 그대로.


주문처럼 외워볼게.

새로운 습관이 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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