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la Sep 12. 2017

그 거울 속의 우리는

- 한창훈 연작소설 『행복이라는 말이 없는 나라』를 읽고


#34 그 거울 속의 우리는:
한창훈 연작소설 『행복이라는 말이 없는 나라』를 읽고




책을 덮었다. 

휴대폰을 꺼내 구글맵을 열고 남대서양이라고 쳐봤다. 오직 푸른색인 깊고도 넓은 바다 한가운데 ‘남대서양’이라 적힌 네 글자가 보인다. 글자에 손을 올린 뒤 확대하고 또 확대해본다. 화면을 온통 파랗게 채운 광대한 대양 위로 두서너 개의 점이 어느덧 슬그머니 떠오른다. 띄엄띄엄 나타난 작은 점들 중에 트리스탄다쿠냐(Tristan da Cunha)라는 섬이 보였다. 세계에서 가장 고립된 마을이라 불리는 섬, 조금 전 덮은 한창훈의 소설 『행복이라는 말이 없는 나라』(한겨레출판, 2016)는 바로 이 섬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남대서양 바다 한가운데의 트리스탄다쿠냐 섬



작가는 20대 시절 어느 공사 현장에서 일하다 이 섬을 처음 알게 됐다고 했다. 막간에 점심을 먹으며 무심코 손에 쥐었던 신문에서 〈단 한 줄의 법조문만 있는 나라〉라는 칼럼을 보았다는 것이다. 김종철 현 녹색평론 발행인이 기고한 그 글에는 트리스탄다쿠냐라는 섬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바다 한가운데의 외지고 척박한 이 화산섬에 한 군인 가족이 남게 되었고 그 이후로 조금씩 정착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작은 마을을 이루게 되었는데, 공동의 삶을 잘 꾸려나가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고민한 끝에 단 한 줄의 법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법의 내용은 이랬다. ‘누구도 특권을 누려서는 안 되고, 모든 사람은 모든 면에서 평등하다고 간주된다.’ 섬사람들은 다 함께 그 한 줄의 법에 충실하며 살았다. 얼마 뒤 화산이 폭발해 본국인 영국으로 이주해야 했지만 3년 후 화산활동이 끝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시 섬으로 돌아갈 것을 택했다. 그들에게 영국은 너무 바쁘고 시끄럽고 이기적인 사회였던 것이다. 작가는 이 칼럼을 오려 지니고 다니며 섬사람들의 이야기를 가슴에 오래 품었다고 한다. 그리고 50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 이야기를 자신의 언어로 풀어 꺼내놓았다.



트리스탄다쿠냐의 유일한 마을, 에딘버러오브더세븐시즈



소설에는 아픈 사람들이 나온다. 돈을 줄 테니 제 얘기를 좀 들어달라는 노인, 성적에 대한 부모님의 압박 때문에 자살하려는 아이, 학생 개개인의 특성보다는 현수막에 써 붙일 수상 경력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교사, 지시와 복종의 원리에 자신의 삶을 박제해버린 항해사, 세상이 말하는 성공에 골몰하며 살아왔지만 행복하지 않은 신문기자, 늙고 병들어 그간 모아둔 돈은 모조리 치료비로 날리고 세상을 떠난 그의 아버지까지. 이건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20여 년을 잠자고 있었던 이야기가 이제 세상에 나온 건 그런 이유일 것이다. 작가는 섬사람의 눈을 빌어 육지의 우리를 본다. 밖에서 들여다본 지금 여기의 우리는 참 아프다.


소설 속 섬사람들은 트리스탄다쿠냐의 그것과 비슷한 법을 만든다. 어느 누구도 어느 누구보다 높지 않다.’(p.21) 잔잔할 때는 모든 물결이 같은 높이로 잔잔하고, 거센 바람이 불면 똑같이 거세게 일어나는 파도처럼, 섬에 다가와 늘 나란한 높이로 부딪치는 물결을 보며 그들은 바다를 닮은 법을 만든 것이다. 이 법을 늘 마음에 담고 살아가는 섬사람들의 눈에, 육지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퍽 낯설다. 남들과의 경쟁에서 이겨 남들보다 더 높이 올라가라고 강요하는 사회가, 그렇게 내몰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서글프고 안쓰럽다. 왜 아니겠는가. 우리는 며칠 전 장애아동을 키우는 학부모들의 눈물을 또다시 보았다. 그들이 무릎을 꿇고 비장애인 주민들에게 특수학교를 설립할 수 있게 해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을 보았다. 장애를 가진 사람은 숙이고 빌어야 하고, 비장애인은 우월한 지위를 누려야 하는 것일까. 선긋기를 하고, 당하는 어른들을 보며 아이들은 과연 무엇을 배울까. 그렇게 선을 긋고 나면 우리는 행복해질까.



'강서지역 특수학교 설립을 위한 교육감과 주민 토론회'에서 장애학생 학부모들은 무릎을 꿇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자살률, 유례를 찾기 힘들만큼 가혹한 입시 경쟁, 점점 일반화되는 성형 수술, 인터넷에 범람하는 악플…… 한국의 인터넷 게시판에서 악플 대 선플의 비율은 4:1로, 1:4인 일본이나 1:9인 네덜란드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다. 지금 한국인의 마음 풍경을 짚은 김찬호의 책 『모멸감』(문학과지성사, 2014)에서 밝힌 내용이다. 나의 존재 가치를 타인에게서 확인받고 싶은 욕구가 엄청난데 반해 서로를 인정해주는 너그러움은 부족하다. 웬만큼 잘나지 않으면 괜찮은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게다가 금수저가 아닌 이상 남부럽지 않은 삶을 내손으로 일구기도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여기서 비롯되는 결핍과 공허를 채우는 방편 중 하나가 바로 타인에 대한 모멸이다. 선을 긋고 깎아내림으로서 나와 상대방을 분리하고 나의 우위와 존재감을 확인하는 것이다.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 트리스탄다쿠냐 사람들의 삶은 어떨까. 위키피디아를 보면 조금의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위키피디아의 트리스탄다쿠냐 항목에 따르면 섬의 토지는 대부분 공동체의 소유이며, 부유한 가정에서 부를 더 축적하는 것을 금하고, 가축의 수 또한 가족 1인당 2마리를 초과하지 않도록 그 수를 제한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의 법전에 새로운 법이 추가됐는지는 비록 알 길이 없었지만, 오랜 과거에 만들어진 그 한 줄의 법과 정신은 여전히 잘 이어져오고 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이것은 그곳 섬사람들에게만 중요한 가치일까. 우리는 한국을 떠나지 않는 이상 ‘누구도 누구보다 높지 않은’ 삶을 누릴 수 없는 것일까.



트리스탄다쿠냐 섬



사실 이런 정신은 주류사회와 멀리 떨어진 남대서양의 외딴 섬 한곳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북유럽의 국가들 사이에서 가정교육의 근간으로 삼고 있는 얀테(Jante)법이라는 관습법 또한 이와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다. ‘사람은 누구도 특별하지 않고, 누구나 소중하다’는 것이다. 이런 교육을 받고 자란 북유럽인들은 평등의 가치를 매우 중요하게 친다. 정치인을 뽑는 데 있어서도 훌륭한 리더란 ‘특출함’이 아닌 ‘동등함’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북유럽의 정서다. 그런 리더의 모습을 핀란드의 전 대통령인 타르야 할로넨의 일화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그녀는 행사 때 본인이 손수 케이크를 구워오고, 해외 순방을 가서도 옷을 직접 다려 입는 등 특권의식이 없는 사람이었다.


우리에게도 가능성은 있다. 대통령이라는, 또는 대통령의 비선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각종 비리를 저지른 범죄자들을 벌하기 위해 추운 겨울 촛불을 켜고 끝내 그들을 끌어내린 우리다. 취임한 이래 연일 탈권위적인 행보로 신선한 파격을 선사한 새 대통령 역시 우리가 우리 손으로 뽑은 대통령이다. 머나먼 섬나라에서나, 저기 잘 사는 북유럽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라고 지레 포기할 필요가 없다. 이 소설도 결국 그런 한 줄기 희망을 가지고 있기에 지구 저 멀리 반대편 트리스탄다쿠냐의 이야기를 굳이 지금의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일 터다. 거울처럼 우리 사회의 아픈 구석을 비추어 보여주고 있는 것일 터다. 

우리는 돌아갈 섬을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고, 떠날 수 없기에 지금 우리가 발붙인 여기를 바꿔나가야만 하므로.




매거진의 이전글 돼지가 되지 않는 방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