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풍속의 牛

걸작과 위작, 이름 속에 감춰진 것들

by 엽서시

청계천 5가를 걸어본 적 있는가.

청계천 여느 거리가 그렇듯 5가 역시 가게들이 거리에 무릎을 감싸 쥔 채로 다닥다닥 붙어 앉아있다. 가게들은 하나같이 좁고 더럽고 시끄럽다. 사람소리, 새소리, 개 짖는 소리 등등.

굳이 청계천 5가의 가게들만 비방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실 아는 사람은 다 알지만 청계천이라는 게 원래 그런 곳 아닌가. 어떻게든 벌을 꾀어내려는 꽃처럼 주인들은 저마다 가게 앞에 나와 악다구니를 써댄다. 아니, 꽃이라기보다는 식충식물에 가까울 정도로. 거리가 좁고 시끄러울수록 오히려 가게 주인이라는 작자들은 가뜩이나 서로 어깨를 부딪치기에도 바쁜 손님들과 참새들과 비둘기로 가득 들어찬 거리 위에 굳이 빨갛고 푸른 플라스틱 의자를 꺼내 그 위에 앉아있거나 거리에 괜스레 물을 뿌려대는 억센 말쑥 같은 작자들이다. 흔히 민생을 민초로 비유하는 바로 그 이유를 볼 수 있는 곳이 청계천 시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청계천 5가는 그 청계천 거리 중에서도 특히나 좁고 지저분하고 시끄럽다. 아는 사람만 아는 그 이유,

청계천 5가가 ‘특히’ 좁고 지저분하고 시끄러운

바로 그 이유로,

청계천 5가에 애완동물 도매상들이 있기 때문이다. 어항에 붐비는 물고기들과 깃털을 흩뿌리는 새들, 각종 들·물·날짐승들을 파는 가게들이 포장된 인절미처럼 뭉쳐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아마 교양 있는 애완동물 전문가라면 이 비위생적인 거리에서 평생 동반자가 될 애완동물을 고르는 것을 권장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곳은 이 곳 나름의 매력으로 가득하다. 청계천 상가 어디나 그러하듯. 붐비는 사람들과, 특히 동물들까지 붐비다 보니 거리는 항상 축제를 하는 들뜬 분위기로 가득하다. 마치 이 거리와 이 거리의 동물들 자체가 하나의 큰 불량식품이라도 되는 것처럼. 굳은 심지가 없는 사람은 쉽게 이 거리에 빠져들고 만다. 그리고 결국 상인들의 상술에 넘어가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동물 한 두 마리를 고르고 있게 되는 것이다.

애완동물 거리가 끝나는 바로 그 골목이 꺾어진 뒤편에는 한 때 연초록색 페인트가 칠해진 역사가 있었을 법한 큰 건물이 있다. 이곳에 오래 있었던 청계천 상인들은 이 건물을 ‘맘모스동’이라고 부르는데, 과거 이 건물이 무시무시한 식욕으로 여공들을 집어삼키던 의류 공장이었음이 분명하다. 거대한 털 짐승의 내부처럼 건물의 안은 따뜻하며, 여공들과 미싱은 사라졌지만 대신 의류를 비롯하여 온갖 것들을 파는 가게로 역시 복작복작하다.

건물 밖을 나서면 항상 젖어있는 꼬부라진 골목들이 제각기 머리끄댕이를 붙잡고 얽혀 있는다. 취한 사람처럼 이리저리 벽이나 가로등 곳곳에 기대있는 오토바이들에 부딪치지 않고 동시에 물웅덩이들을 피한다는 일은 사실 서울토박이라 할지라도 이 청계천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라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게다가 손에 흔들리는 비닐봉지라도 든 양에는 진짜 서울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적절한 동체시력과 신체조건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당신이 뛰어난 자제력의 소유자로, 청계 5가에서 신기한 동물을 사지도, 맘모스동 사이의 골목을 지나오면서도 오토바이에 부딪치기는커녕 바짓가랑이 한 구석 젖지 않았다면, 당신 역시 진짜 서울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부해도 좋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런 진짜 서울사람에게라면 이 청계 5가 뒷골목 맘모스동의 ‘전설’에 대해 이야기 해줄 마음이 생길지도 모른다. 사실 이 ‘전설’은 그 쪽 사람들에겐 이미 유명한 것으로 나보다도 더 잘 아는 사람들도 더러 있으리라 믿는다. 오히려 최근에야 이 전설을 알게 된 내가 진짜 서울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 우스꽝스럽기조차 하다. 그렇기에 이 글을 쓰기까지 망설였지만, 그렇게 망설인 끝에야 이 글을 쓰는 고로, 보다 더 제대로 이 이야기를 풀어놓고자 한다. 다시,

이야기를 제대로 시작하자면 앞에서 설명한, 끽끽거리는 새소리와, 고양이 우는 소리, 강아지들이 끙끙 앓는 소리, 온갖 설치류들이 찍찍대는 소리, 거북이들이 수조를 긁어대는 소리, 소라게들이 부딪치는 소리와 더불어 비둘기와 참새들이 온갖 털과 똥들을 뿌려대는 청계5가를 지나 개미굴 같은 뒷골목을 꼭 지나야 한다. 청계 5가에서 온갖 동물들이 안겨주었던 화려한 색깔들이 미처 홍채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청계천 골목이 주는 암울한 회색에 흠뻑 젖어 봐야 한다. 그리고 다시 낡은 건물의 낡은 계단으로 들어서야 하는데, 이 계단으로 말할 것 같으면 땅거미의 굴 만큼이나 어둡고 음침하다. 계단이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동굴이 가까울 만큼 계단의 경사도 높으며 그만큼 양 옆이 비좁아 손으로 양 벽을 짚고 내려갈 수 있을 정도이다. 낡은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면 계단 양 옆의 벽에 벽지마냥 붙어있는 옛 명화들의 낡은 인쇄본들이 들어오고, 코에는 그림들이 뿜어내는 날숨냄새가 지독하게 닿는다. 그렇지만 벌써 코를 쥐기엔 이르다. 비명소리를 내는 미닫이문을 마저 힘껏 밀어젖히고 난 쥐구멍처럼 좁은 가게에는 만 76세의 화상이 방금 배달 온 백반에 덮여있는 신문지를 들추고 순두부찌개에 막 수저를 들이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눈은 화방 가득한 인간의 붓이 놀려낸 끽끽거리고 울고 앓고 찍찍대고 긁고 부딪치는 동시에 온갖 것들을 뿌려대는, 그림들의 침묵 속의 아우성으로 빨려들어 간다.

이 맘모스동에는 무려 5곳의 화방이 있다. 화방, 이라는 말이 맘모스 만큼이나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빙하시대 때 멸종한 맘모스처럼, 우스운 단어들이 있다. 전당포, 지물포, 화방 같은 말들이 바로 그러하다. 빙하에 갇힌 채 나오지도 움직이지도 살아있지도 않은 맘모스처럼 이러한 가게들은 이제 고전소설의 지면 사이에 갇힌 채로 굳어있기 일쑤다. 그렇지만 이 가게는 분명 화방이며, 이 노인은 분명 화상이다. 정말로 아직도 이 가게는 그림을 팔고 이 노인은 그림을 판다. 정말 온갖 고전소설들에서 읽었던 그 낡은 화방의 분위기가 그대로 물씬 우러나온다. 물론 이 곳 화방을 들르는 화가들은 소설에서처럼 사흘에 빵 한 덩이와 커피 한잔으로 굶주린 육신을 달래지 않는다. 사흘에 라면 한 냄비와 소주로 지친 육신과 예술혼을 달래는 화가들이 이 화방에 그림과 자신의 혼을 맡기고 떠난다. 이 화방에 비록 고흐나 세잔의 그림은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파리의 아틀리에만큼 자랑스러운 서울 복판의 화방임이 분명하다.

사실 이 맘모스동 건물에는 신인작가들이 그려대는 유화작품보다 그보다 더 많은 옷가게들과 이러저러한 작은 식당들이 더 화려하고 지독한 냄새를 뿜어대고 있다. 그럼에도 다섯 곳이나 되는 화방이 아직 이 맘모스 건물 안에서 어깨를 붙이고 살고 있으며, 한 때 이곳, 그리고 한국에 미술수집 붐이 일었을 때는 이 건물에만 무려 화방이 일곱 곳, 거리를 통틀어 열두 곳이나 되는 화방이 숨을 쉬었던 역사가 낡은 지층처럼 떨어지는 페인트 조각 사이에 숨어있다. 아직도 간혹 잡지나 신문에서 서울의 명소를 소개하는 낡은 코너에서 때때로 이 곳 화방 골목이 슬쩍 얼굴을 비치기도 한다. 특히 평소 무슨 디자인이나, 서울의 전통과 멋을 강조하는 풍조를 가진 신문이나 잡지라면 거의 100%라고 장담할 수 있다. 물론 모든 잡지와 신문이 서울의 명소로 이곳을 소개하리라고는 100% 장담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일단 이 맘모스동 화방들이 소개된 지면에 이 76세의 노화상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 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 곳 화방에서 이 노화상의 존재는 거의 ‘태조’며 ‘세종’에 필적하는 존재로 이 맘모스동에 가장 일찍 화방을 연 사람이다. 그 자신도 한 때 미술학도였으며 한국 미술의 부흥을 꿈꾸는, 캔버스에 열정을 쏟던 순수한 젊은이였지만 결국 10년이라는 시간과 돈, 머리숱만 잃잔뜩 잃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그나마 남은 돈으로 이 건물에 가게를 열었다고 한다. 물론 그렇게 연 가게가 화방이라는 점을 보면 역시 정신을 완전히 차리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그때는 이 맘모스동에 골동품가게가 여럿 있던 시절이었으며 골동품에 투자하는 사람들이 꽤나 있던 이른바 ‘골동품 붐’의 시대라 비교적 ‘예술’에 투자하는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었다고 한다.

만일 이 화방 역사에 전후 한국 미술사로 비유하자면 이 노화상은 화가 L의 존재로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노화상과 이곳 화방이 뜬 것도 화가 L덕분이기도 하며,

아무리 미술에 무관심한 당신이라 적어도 교과서에서만큼이라도 화가 L의 그림을 보았으리라 믿는다. 흰 물감을 담뿍 두른 붓으로 북북 긁은 듯이 내려 그린 <황소>나 연작 중에서도 복숭아를 둘러 싼 아이들이 둥글게 손을 잡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웃고 있는 <무릉도원3>등, 어느 정도 교양 있다 자부하는 한국인이라면 L의 명작을 얼른 하나로 손꼽을 수 없을 만큼 불후의 명작들을 남긴 작가이기도 하다. 그리고 회자되는 그의 또 다른 명작,

<돌풍 속의 牛>

이름부터 원로시인 S가 직접 붙여 화제가 되었던 이 명작은 캔버스 50호를 가득 매운 대작으로, 캔버스는 꿈틀거리며 물결치는 청회색으로 가득 차있다. 진회색이 가득 섞인 갈색 젖은 땅을 힘차게 딛고 있는 밝은 회색의 소는 잔뜩 근육을 부풀린 채로 머리를 숙인 채 어딘가를 노려보고 있다. 그 소의 쏘는 듯 한 눈빛을 따라가면 멀리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진한 청색으로 그려진 소가 적수의 눈빛을 그대로 받으며 굳건히 서 있다. 이 연회색의 소는 캔버스 가득 몰아치는 청바람에 홀로 살을 섞는 외로운 짐승이기도 하면서,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적수를 향해 한 쌍의 비수를 갈아낸 야수이기도 하다. 마치 자기 자신을 그대로 닮은 듯, 마찬가지로 외로운 듯 서로를 바라보는 한 쌍의 황소를 담은 이 L의 거작은 그 그림 자체로도 한국 미술사에 남을 대작이지만, 지금은 전해지지 않으며 그 사연만으로도 역사에 남을 법 하다.

알다시피 <돌풍 속의 牛>는 기자들과 미술 애호가들 앞에서 화형식을 당했던 것이다.

노화상L이 바로 이 <돌풍 속의 牛>를 찢고 불태운 장본인이었다. 그 후 신문 기사에 따르면 L은 ‘千辛萬苦, 刻骨의 노력 끝에’ 이 대작을 얻었다. 처음에는 횡재한 기분이었으나 이 작품을 오래 바라던 그는 무언가 더 이상의 기분을 느끼게 되었다.

이 작품이 높은 가격을 받는 다면 그것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그렇지만 이 그림이 가격 이상의 높은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면,

당시의 세상이 어떠하였는가. 군인 출신의 대통령은 자신을 단군 이래 최고의 지도자로 극찬한 시인에게 손수 末堂이라는 호를 새로 지어주었으며 국민들에게는 3S를 보도지침했고, 문학과 예술은 기침소리 한 번 못 내는 시대였다.

걸작이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이런 세상에서.

결국 노화상은 ‘미술 인생에서 가장 훌륭한 그림’인 이 작품을 두고 일생일대의 도박을 걸었다. 화상은 천연덕스럽게 <돌풍 속의 牛>를 어떤 신인 화가의 작품으로 내걸었다. 가격 역시 다른 50호 유화와 비슷한 수준으로 만들었음은 물론이다. 노화상이 <돌풍 속의 牛>를 손에 넣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믿을 수 있는 주변의 지인 몇 뿐으로 그들 역시 찬성했기에 걸 수 있었던 도박이었다. 화상은 대박 노다지를 노리며 골동품 가게를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눈앞에 그 대작을, 그 진짜 노다지를 고스란히 노출시킨 것이다.

1년하고도 8개월 12일이 흘렀다. 지나가는 어느 누구도 L의 그림에 눈길하나 주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노화상은 화가 L의 기일에 맞추어, 기자들과 미술애호가, 평론가들 앞에서 그 그림을 불 질러 버렸다. L은 다시 죽었노라, 그리고 한국 미술도 죽었노라, 선언하면서. 이 노화상의 기벽이 사회 전반에 걸쳐 화제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 미친 짓거리를 비판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렇지만 대부분은 미술의 가치가 상업적으로 전락해버린 세태에 고개를 끄덕였다. 6월 항쟁이 대한민국을 몰아치기 전이었다. 사람들이 돈 이상의 것들도 있겠구나, 생각하던 때였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한국에 미술수집 붐이 일었다. 일반인들이 미술에 관심을 가지고 몇몇은 화방에서 직접 신인작가들의 그림을 사기도 했다. 물론 그들 중 대다수는 노다지를 캐는 심정으로, 또 노화상이 어딘가에 숨겨두었을 <돌풍 속의 牛>를 바랐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맘모스동에 몇 곳의 화방이 새로 생겼으며, 오늘날까지 한가람 미술관에서 개최하고 있는 ‘이름 없는 그림들’ 전시회*가 그 무렵 열리기 시작해 이어져 오고 있다.

몇몇 비평가들과 교수들은 이 노화상에게 회의를 갖기도 한다. 가장 설득력있는 음모론은 노인이 태운 그림은 <돌풍 속의 牛> 진품이 아닌 위작으로, 본인이 직접 그렸으리라는 것이다. 노화상의 젊었을 때 작품들을 보면 L의 영향을 받은 것이 뚜렷하며, 또 그 자리에서 감정가들이 진품이라고 감정했다 하지만 <돌풍 속의 牛>가 몇 년간 노화상의 품안에 있었던 작품이었기 때문에 그 진품이라는 결정에 의심이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 노화상이 어떤 일간지에서 고흐의 작품 ‘닥터 가셰의 초상화’를 무덤으로 가져간 어떤 일본 미술수집가에 자신을 비유한 일이 있었는데 이 역시 어떤 다른 의미를 암시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즉, 노화상이 어딘가에 L의 진품을 보관해두고 있으리라는 것이다. 이들은 노화상이 한국 미술에 화두를 던진 점은 높게 사나, 만일 진품을 숨겨두고 있다면, 그것은 한국 미술계 자체를 업신여기는 일로 반드시 공개해야 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에 노화상은 묵묵부답으로 언젠가 ‘그 놈들은 내가 왜 그 그림을 태웠는지 아직도 모른다’며 어깨를 으쓱해 보이기도 했다. 몇몇 미술애호가, 수집가, 미술학도, 평론가, 교수들이 듣는다면 분노하겠지만 사실 내게 <돌풍 속의 牛>은 책 안에 갇힌 맘모스에 불과하다. 어쩌면 아직 이 진품이 남아 노화상과 함께 관에 묻히는 것이 더 낭만적이지 않은가 생각해 본 적도 있다. 마치 지구 어딘가에 맘모스가 아직 살아있다고 믿는 것처럼. 설사 불사른 작품이 위작이라 하더라도, 한때 L을 꿈꾸던 화가가 그린 L의 위작이 L의 진품으로 감정 받은 바로 그 순간 감정사들 앞에서 그 진품을 불질러버렸다는 것 역시 낭만적이지 않는가.

만일 그 감정사들이 전날 자신의 작품을 L의 모사에 지나지 않은 쓰레기 취급한 바로 그 평론가들이라면. 물론 이제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돌풍 속의 牛>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노화상이 이젠 위작이자 사라져버린 L의 작품을 보는 그 기분은 어떨까. 조소일까, 아니면 자신 스스로는 따라잡을 수 없는 그 경지에 대한 선망일까.

어쨌거나 나로서는 결코 알 수 없는 기분인 것이다.

사실 나도 나름대로는 <돌풍 속의 牛>가 정말로 사라졌는지 궁금하다. 게다가 난 그 논란 속의 장본인과 같이 이야기하고 식사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어느 날은 순두부찌개와 같이 나온 우렁된장찌개를, 그와 같이 후후 불어먹으며 내가 장난스럽게 위작이 아니냐고 물어본 일도 있었다.

꿈틀거리는 붉은 국물과 흰 살덩이가 물결치는 찌개 안에서, 보일 듯 보이지 않을 듯 진하게 뜬 붉은 기름 사이로 순두부를 한 숟갈 가득 뜬 노인은 걸쭉히 웃으며 대답했다.

“위작이라니, 진짜, 그거야 말로 진짜 걸작이었다구.”







* 이름 없는 그림들. 매년 10월 1일부터 11월 31일까지 두 달간 개최되는 미술전시회로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각 작품들은 기성작가나 신인작가들이 직접 투고하는 작품으로 전시되며 전시되는 동안 작품에는 일절 작가의 이름과 제목이 공개되지 않는다. 전시회가 끝나는 마지막 주간에 다시 작가들의 이름과 제목을 붙여 전시하는데 이전에 입장한 관람객이라면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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