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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Sep 29. 2020

시간이 지나도 그대로인 어떤 미소와 그 결연함

다시 만난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2004)와 다케우치 유코

테드 창의 단편을 원작으로 한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 <컨택트>(2016)는 외계 종족 헵타포드의 언어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그들처럼 비선형적 시간관을 경험하게 되는 언어학자 '루이스'(에이미 아담스)의 이야기다. 원형으로 생겨 시작도 끝도 없이 모든 이야기를 단 몇 초 안에 '그릴' 수 있는 그 언어를 학습하며 '루이스'는 점차 자신에게 예고 없이 끼어들었던 환영 같은 이미지들이 아직 자신에게 찾아오지 않은 훗날의 일들이라는 것을 안다. 미래를 미리 '기억'하게 된 '루이스'는 자신의 앞에 다가온 그 모든 것들을, 담담하고도 결연하게 받아들이기로 한다.


"모든 여정을 알면서, 그 끝을 알면서도, 난 모든 걸 받아들여. 그 모든 순간을 기쁘게 맞이하지."

("Despite knowing the journey, and where it leads, I embrace it, and I welcome every moment of it.")


<컨택트> 이야기를 평소에 자주 해왔던 편이기는 하나, 지금 말할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2004)를 생각하기 위해 그것을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미래를 끌어안는 그 얼굴과 그 마음을.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 스틸컷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를 다시 본 것은 물론 배우 다케우치 유코(1980.04.01~2020.09.27)의 비보를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 영화를 언제 처음 봤더라. 저작권이나 콘텐츠 창작 과정의 노고 같은 것에 관해 거의 무지했던 때. 아마도 웹하드 사이트 혹은 토렌트 같은 곳에서 다운로드를 했을 것이다. 영화를 관람하거나 감상하는 일에 지금과 같은 의미를 두지 않았던 시기가 있었으므로, 정확히 그때를 특정할 수 없지만 2000년대 말 혹은 2010년대 초였을 것이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를 처음 만났던 것이. 어떤 배우가 출연하는지를 알고 어떤 서사가 펼쳐지는지는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때와 지금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미오'를 연기한 다케우치 유코의 모습 외에는 내게 모든 것이 다른 영화 같았다. 여전하면서도 그때와 다른 지금. 같은 이야기지만 지금에 와 달라진 것들.


*이후 서술은 만약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언급은 없지만 간접적인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 스틸컷


표면적으로는 '죽은 아내가 1년이 지난 뒤 비의 계절에 잠시 돌아오면서 생기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미오'(다케우치 유코)가 어떤 초자연적 현상을 통해 자신에게 아직 다가오지 않은 일들을 미리 알게 되는 이야기다. (당장 제목의 의미 역시 명확하게 그렇다.)


이야기 속 이야기의 '타쿠미'(나카무라 시도)와 '유우지'(다케이 아카시) 시점에서는 장마와 함께 찾아온 자신의 아내/엄마가 기억을 잃은 채 자신들과 6주의 시간을 보내는 이야기겠지만, '미오' 시점에서라면 이것은 하나의 꿈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아니, 어쩌면 꿈이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는. (편의상 이야기 속 이야기를 '꿈'이라고 칭해보자.)


"누구에게 말해도 절대 믿어주지 않겠지. 솔직히 나도 안 믿어지니까."라고 하면서도 '미오'는 이어 말한다. "스무 살의 나는 스물아홉 살의 너를 만났고 사랑을 했고 네 품에 안겼어. 나는 미래로 갔다 온 거야." 그래서 그는 "너와 다시 한번 사랑을 했어."라고 하는 것이겠다. '다시 한번'. 꿈속에서 '미오'는 '타쿠미'에게 자신들이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를 듣는다. '타쿠미'에게는 이미 일어난 일이자 꿈속의 '미오'에게는 아직 겪어보지 않은 일.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 스틸컷

아무것도 알지 못했던 꿈속의 '미오'는 짧은 꿈속에서 몇 년의 체험을 한다. 사진과 홈비디오 속의 흔적들, '타쿠미'와 '유우지'의 증언들은 처음에는 와 닿지 않고 막연한 것이었지만 점차 '미오'는 그것을 진짜 자신의 삶이었다고 여기게 된다. '타쿠미'의 기억 속 이야기처럼 '타쿠미'의 상의 주머니에 손을 넣고, '타쿠미'의 기억 속 이야기처럼 손이 시리다고 말한다. 꿈속의 지난 자신이 '유우지'에게 남긴 그림책을 통해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들과 곧 비의 계절이 끝나면 일어나게 될 일을 알게 되고, 훗날의 시간들을 생각하며 '유우지'에게 집안일을 가르치고 그의 생일 케이크를 당겨 예약한다.


"이대로 헤어져서 지내면, 난 다른 사람과 결혼해서 다른 삶을 살게 될까?"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 스틸컷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 스틸컷

꿈에서 깬 '미오'는 생각한다. "너와의 미래를 알아버렸으니까" 그 미래를, 그 삶을 선택하러 나선다. 횡단보도를 지나며 잠시 망설이며 잠시 하늘을 본 뒤, 돌아서는 그 발걸음에는 자신의 지금까지 살아온 세계에 앞으로 살게 될 세계를 새로이 맞아들이는, 그것을 현재로 끌어안는, 결연한 마음이 담겨 있다. 그것은 정해진 운명처럼 앞날을 체념하고 수용하는 일이 아니라, "내 마음이 그걸 원해"라며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스스로를 움직이는 일이다.


그래서, '미오'는 일기를 쓰듯 편지를 쓴다. 전화를 걸어, 당신을 만나러 가겠다고 한다.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미리 기억한 사람에게 전해지는 그 단단하고 깊은 감정, 확고한 결심. 거기에는 모든 불확실함과 불가해함 들을 뛰어넘은 사랑이 있다. 그러고 보니, 앞에서 말한 영화 <컨택트>(2016)에서. '루이스'는 처음 안아본 사람에게 "당신 품이 얼마나 따뜻한지 잊고 있었어."라고 말한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의 '미오'도, 그와 꼭 닮은 말과 행동을 한다. "괜찮아. 우린 잘할 수 있어. 그렇게 정해져 있어."




아. 영화가 있다는 게 내게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순간엔 이런 것도 포함되어 있다. 2004년에나 2020년에나 "괜찮다"라고 말해주는 어떤 순간이 있다는 것. 그 순간은 가령 2030년쯤 다시 꺼내도 거기 그대로일 것이라는 믿음. <지금, 만나러 갑니다>에는 '미오'가 '타쿠미'에게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가라고 말해주는 장면이 있다. 배우의 작품 너머 삶을 우리는 짐작도 할 수 없고 다 알지도 못한다. 고인이 된 이의 삶을 두고 어떻다고 말하는 건 실례가 될지도 모른다. 그의 선택을 존중하고 그가 살았던 삶과 그가 남긴 작품을 우리는 다만 기억하고 생각할 따름이다.


매년 여러 영화인들이 세상을 떠나고, 또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새로운 얼굴들이 스크린으로 관객을 찾아온다. 다케우치 유코도 결국은 오랜 시간이 지나면 그중 한 명으로 남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럴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를 오래 기억하고 싶다. 어딘가에서 편히 쉬고 있을 그에게도 나직이 말해주고 싶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가라고. 다치지 않게.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 스틸컷
다케우치 유코(竹内結子). 출처 'Nikkei Asian Review'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 국내 재개봉 포스터

<지금, 만나러 갑니다>(いま、会いにゆきます, 2004), 도이 노부히로 감독

2005년 3월 25일 국내 개봉, 2018년 4월 19일 국내 재개봉, 118분, 12세 관람가.


출연: 다케우치 유코(미오), 나카무라 시도(타쿠미), 다케이 아카시(유우지), 오오츠카 치히로(고등학생 미오), 아사리 요스케(고등학생 타쿠미), 코히나타 후미요(노구치), 이치카와 미카코(나가세), 유(유우지의 선생님) 등


수입: (주)엔케이컨텐츠

배급: (주)디스테이션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가요.

배우가 세상을 떠나도, 영화는 이렇게 남는다. 삶이 지나도 이야기가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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