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년시절의 너'(2019) 리뷰
어디서부터 이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소년시절의 너>(2019)는 익숙하게 짐작할 수 있을 만한 '중화권 멜로/로맨스'의 틀에 그다지 넓게 포획되지 않는다. 몇 가지 생각나는 대로 쓰기 위해 작중 언급되거나 발화된 몇 개의 말들을 중심으로 풀어봐야겠다.
영화 시작 부분과 끝부분에 반복되는 두 개의 장면에서 '첸니엔'(주동우)은 아이들 앞에서 영어를 말하고 있다. 특히 'was'와 'used to'의 차이에 대해 말하는 중이다. 시제 면에서는 둘 다 과거에 해당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used to'는 이제는 더 이상 '-하지 않다'라는 상태의 변화를 나타낸다. '첸니엔'은 'This was our playground.', 'This used to be our playground.' 같은 문장들을 아이들이 따라 하도록 여러 번 읽기까지 하는데, 이 내용은 허투루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내 식대로 말하자면 사람의 과거에는 평생을 안고 가야만 하는 어떤 것이 있겠고, 더 이상 짊어지지 않아도 되는, 즉 후회하거나 얽매이지 않아도 되는 선택도 있을 것이다. <소년시절의 너>를 보고 나면 그러니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 세상에는 빛이라는 것도 있으니까, 너무 깊숙하게 숨거나 도망치기만 하지는 않아도 좋겠다는 하나의 위로. 영화에서 두 번 되풀이되는 이 'was'와 'used to' 이야기는 그래서, 당연히 처음 들을 때와 두 번째 들을 때 전해지는 감상이 다르다. 시작되는 이야기 앞에서, 그리고 모든 이야기를 만나고 난 뒤에서.
<소년시절의 너>의 서두에는 사뭇 계몽적으로도 느껴질 수 있는, 학교 폭력 이야기가 나온다. 대략 이런 이야기. 학교 폭력은 당신의 바로 곁에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절망을 안고 있을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기를. 단지 영화의 주인공 '첸니엔'과 '샤오 베이'(이양천새)가 폭력의 당사자이거나 경우에 따라 가해자가 되기 때문만이 아니라, 영화의 도입부터 전면에 교내에서 일어나는 폭력으로 인한 비극적인 일들과 그 파장이 이어진다. 친하지는 않았지만 같은 학급에 있었던 친우의 자살. 모두가 멍하니 지켜보거나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을 찍고 있을 그때, '첸니엔'은 가만히 다가가 자신의 체육복 외투를 벗어 죽은 친우에게 덮어준다. 누군가 왜냐고 묻자, '첸니엔'은 다만 이렇게 답한다. "그 애는 그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을 것 같아서." <소년시절의 너>에서 학교 폭력은 감정을 자극시키는 소비적인 소재가 아니라 주인공의 내면과 곧장 닿아 있고 이야기 전개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핵심이다.
어른들은, 왜 이야기하지 않았냐고 말한다. 상담실을 운영할 테니 무슨 일이 있으면 이야기하라고 한다. 그러나 그 '어른'들 중 학교 폭력의 피해자들이 겪는 고통과 두려움을 진정으로 헤아릴 수 있는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소년시절의 너>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피해자 중 누군가가 용기를 내서 경찰에 신고를 하지만, 가해자들은 형식적인 수준의 심문과 가벼운 정학 처분만 받고 이후 '별 일 없이' 학교를 계속 다닌다. 예상했던 대로, 가해자들은 조금도 반성의 기색 없이 피해자들에게 장난스럽게 보복 행위를 한다.
만약 '첸니엔'에게 '샤오 베이'가 없었더라면. 또 다른 누군가에게 얻어맞고 있는 '샤오 베이'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랬더라면 '첸나이'에게도 '후 샤오디에'(장예범)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폭력이나 따돌림을 실질적으로 겪어보지 않은 내가 과연 이들의 상처 입은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거나 헤아린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소년시절의 너>를 보면서 한편에 아픈 마음이 자리 잡는 건 분명 이것이 누구에게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이라는 점을 알기 때문이다.
상술한 교내 폭력적인 일들과 대조적으로 학교에서는 '대입시험 60일 전'과 같은 카운트다운을 교내 대형 전광판에 띄우며 긴장감을 조성한다. 이 긴장감은 '여러분의 미래가 달려 있으니 체력과 정신력을 가다듬자' 같은 주문이라기보다는 교내에서 끔찍한 일이 있더라도 '너희들은 좋은 대학에 가야만 하니 신경 쓰지 말고 공부나 계속하라'는 명령처럼 다가온다. 예를 들면 자살 사건이 있은 후 '첸니엔'은 형사들의 조사를 받다가도 수업시간이 되자 '시험이 코앞이니까' 교실로 돌려보내 진다. (이건 어쩌면 '첸니엔'에게 마땅히 필요했을 일인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베이징'에 가야 하는 가정적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명문대에 가기 위한 학생들의 막바지 공부는 영화에서 주의 깊게 묘사되고, 야근에 풍등에 소원을 적어 띄워 보내는 일에도 '합격' 같은 구호가 따른다. 교내에서는 이를테면 '공부로 승리 쟁취, 우리는 챔피언' 같은 표어가 일상적으로 보이고 교사들 역시 '지금의 공부가 너희들의 미래를 바꾼다' 같은 요지의 말들을 학생들에게 계속 주입한다. 요컨대 <소년시절의 너>의 '첸니엔'과 '샤오 베이'의 관계를 만드는 상황은 꽤 입체적이다. 마음 편히 공부만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주변의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도 없는 '첸니엔'의 환경에서, 아이러니하게도 학교도 다니지 않고 '무식'하게 보이며 불법적인 일도 하는 '샤오 베이'의 존재는 없어서는 안 되었을 것처럼 다가온다.
"날, 보호해줄래?"
"언젠가 밝은 대낮에 둘이 당당하게 걷고 싶어."
"머리도 나쁘고 돈도 없고 미래도 없지만 그래도 누군가를 사랑하게 됐어. 그 애한테 행복한 결말을 주고 싶어."
"네가 먼저 세상에 나가면, 내가 널 찾아갈게."
"어른이 된 후에 다시 만나는 거야."
"넌 계속 걸어, 네 바로 뒤에 내가 있을게."
"넌 옳은 일을 했어. 그리고 그로 인해 그림자가 생길 거야. 하지만 위를 보면 늘 별이 있을 거야."
영화의 이야기는 오래 기억에 남을 만큼 깊게 다가왔지만, 연출이 인상적인 데 반해 영화의 모든 면이 뛰어나게 다가왔던 건 아니었다. 예컨대 정 형사의 서브플롯은 일정 시간을 넘어가자 조금 과잉처럼 느껴지는 대목도 있었고, 학교 폭력에 대한 중국 교육/공안당국의 대응을 담은 후반부 언급들은 지나치게 교훈적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첸니엔'과 '샤오 베이'의 서로를 향한 감정은 배우의 얼굴과 함께 온전한 설득력이 있었고, 오히려 두 사람의 지난 선택들과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응원하고 싶어 졌다.
"우리는 모두 시궁창에 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어떤 이들은 별을 바라본다."
(오스카 와일드, 『윈더미어 부인의 부채』에서)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나면 가슴 뭉클해지는 순간들이 기억에 남는다. 마음을 울리는 순간들도 기억에 남는다. 두 사람의 생생한 눈물과 그만큼 또 생생한 웃음과 서로가 나란히 함께였던 순간들이 그려진다.
"그때로 돌아가면 같은 선택을 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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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는 가정법이 없고 우리 이야기에도 마찬가지라고, 지난 선택에 그러니 후회하거나 그로부터 도망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동안 그런 마음가짐이 마음에만 그치지 않을 수 있을까에 관해 생각한다.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의 모든 첸니엔/주동우의 모습을 눈과 마음에 가득 기억해두고 싶었다. <먼 훗날 우리>(2018)에 이어, <소년시절의 너>(2019)에서 더욱더 무구하고 깊어진 얼굴을. 이 영화를 한 번 더 보고 싶다.
<소년시절의 너>(少年的你, Better Days, 2019), 증국상 감독
2020년 7월 9일 (국내) 개봉, 135분, 15세 이상 관람가.
출연: 주동우, 이양천새, 팡 인, 오 월, 주 이, 장예범, 장흠이, 황각 등.
수입: (주)더세컨드웨이브
배급: (주)영화특별시SMC
*(★ 7/10점.)
*<소년시절의 너> 예고편: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