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동진 Nov 05. 2018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낸 채 그들은 달을 향하네

영화 <퍼스트맨>(2018)

하나의 세계가 끝나는 경계에 이르면 누군가의 뒷모습을 느끼곤 한다. 이 삶에서 내가 떠나온 것들에 대하여, 혹은 나를 떠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들에 대하여 돌아보는 순간이 바로 그 경계다.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인 약 384,000km는 빛의 속도로는 채 2초도 걸리지 않는데, 그 시공간이 누군가에겐 찰나이고 또 누군가에겐 영원이다. 돌아오지 못할 수 있음을 알고서도 떠나는 자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 나는 바로 그 떠나는 자는 그 순간에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의 앞모습조차도 등진 채 기어이, 끝내, 어려운 걸음을 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한다. 한 사람은 곧 하나의 세상이다. 시간을 내어주는 건 곧 삶을 내어주는 일이다. 생명은 시간으로 이루어지기도 하니, 이 삶은 나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카운트다운이 이루어질 때 그는 지구가 아니라 삶을 떠나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삶을 떠나는 기분이었으리라는 말은 정말이다. 아폴로 11호가 달을 향해 출발하기 전, <퍼스트맨>(2018)은 '닐'(라이언 고슬링)과 대원들의 상사의 목소리를 빌어, '미리 쓰인 추도사'가 준비되어 있음을 관객에게도 알려준다. '재닛'(클레어 포이)이 '닐'에게 따져 묻는 말처럼, "귀환하지 못할 확률이 0이 아니라는" 위험을 감수하고 아폴로 계획을 추진하는 것이다. 물론 국가적으로는 소련과의 우주 개발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시작된 프로젝트지만, 영화의 시선은 사회적 배경에 대해서 굳이 집요해질 생각은 없다. 다만 그런 이면이 있었다는 것 정도를 보여줄 뿐이다.


영화 <퍼스트맨> 스틸컷
영화 <퍼스트맨> 스틸컷


영화에서 실제로 그들이 달로 향하기까지 수많은 계획과 시행착오들이 있었다는 걸 떠올리면, 거기에는 단지 물리적으로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갔다는 사실뿐 아니라 인명의 희생도 적지 않았음을 함께 떠올려야만 하겠다. 게다가 '닐'은 아폴로 계획의 전신 격인 제미니 계획에 참가하기 전, 병으로 딸을 잃었다. 그리고 딸 '카렌'을 상실한 일은 영화 내내 '닐'의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 임무 중 '닐'이 종종 지난 일들을 돌아보는 것에는, 단지 안전사고가 벌어진 원인이나 자신의 실수 같은 것만이 있지는 않다. 그는 동료의 장례식에서도 환영처럼 자신의 딸을 보고, 달에 가서도 딸을 생각한다.


이쯤 되면 나는 생각한다. '닐'이 그렇게 달에 가기 위한 계획에 집착적으로 몰입했던 이유는 (그가 자신의 한 걸음이 "인류의 위대한 도약"이라 말한다는 사실을 고려하더라도) 인류의 원대한 탐험을 생각하기 때문이라기보다 자신이 그동안 떠나왔거나 떠나보내야만 했던, 지나간 많은 것들, 혹은 모든 것들이 헛되어서는 안 된다는 필사적인 절박함 때문이다. 떠나기 직전 두 아들에게 선뜻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는 이유 역시 자신마저 그들을 떠날 수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아서다. 영화 역시 다른 사고로 먼저 죽은 동료의 남겨진 가족의 뒷모습을 보여주는 신 등을 통해, 비록 '인류가 최초로 달 표면에 착륙한다'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임에도 작품 스스로는 인류의 역사가 아니라 한 사람의 역사를 헤아리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내비친다.


한 사람의 역사는, 곧 지나온 발자취의 기록이다. 앞을 바라보며 어려운 걸음을 뗀다는 것은, 지나오고 떠나온 것들을 헛된 것으로 그치지 않게 하겠다는 각오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리라. 그러니 다시 말하자면, '지구가 아니라 삶을 떠나는 기분'이라는 건 물리적 한계를 벗어나는 일이기도 하겠다. 내가 다른 세계에 있다고, 즉 이 세계에 없다고 상상하는 일. 하나의 세계의 물리적 한계를 초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겠다. 이는 시간과 공간을 모두 초월한다.


영화 <퍼스트맨> 스틸컷


슬프게도 하나의 세계가 유지되려면, 반드시 두 번의 헤어짐을 겪어내야만 하는 건지도 모른다. 하나는 물론 누군가가 나를 떠났다는 사실일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 누군가가 나를 떠나갔다는 사실로부터 떠나야만 한다는 사실이겠다. 달 표면에서 '닐'은 내내 가슴속에 지니고 있었을 어떤 물건 하나를 홀연히 분화구 너머를 향해 놓는다. 던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손에서 놓는 것. 비교적 최근에 세상을 떠난 한 시인은, 후배 시인의 시집에 실은 발문에서, 그의 시구 하나를 인용해 글의 제목을 이렇게 지었다.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내며 시인은 시를 쓰네"(허수경, 박준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발문, 문학동네, 2012) 첫 번째 헤어짐에 이어 두 번째 헤어짐까지 겪어야 한다는 것은, 삶을 떠나는 기분만큼 어렵고 참담한 것일 수밖에 없겠다. 영화 <퍼스트맨>의 주인공은,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낸 채 달의 노래를 불러야만 했던 사람'들인 셈이다. 그리고 그런 일을 겪은 사람들은, 이 세상에 돌아와서도 "딴 세상에 잠시 다녀온" 이들이 되어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한다. 온 마음을 쏟아낸 채로, 자신이 지금 살아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릴 수 있을 만큼. 그러나 자신이 쥐고 있던 것을 눈물겹게 놓아본 사람은, 다음에 자신에게 오게 되는 것을, 바로 그 다음이라는 것을, 온 힘을 다해 놓치지 않고 잡아볼 수 있으리라. (★ 8/10점.)



영화 <퍼스트맨> 국내 메인 포스터

<퍼스트맨>(First Man, 2018), 데이미언 셔젤 감독

2018년 10월 18일 (국내) 개봉, 141분, 12세 관람가.


출연: 라이언 고슬링, 클레어 포이, 제이슨 클락, 카일 챈들러, 패트릭 후짓, 코리 스톨, 시아란 힌즈, 루카스 하스, 크리스토퍼 애봇 등.


수입/배급: UPI코리아


영화 <퍼스트맨> 스틸컷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