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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Jan 13. 2019

아는 만큼 보이는 게 아니라, 경험한 만큼만 아는 삶

영화 <그린 북>(2018)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어떤 계기로 인해 여정을 함께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는 수없이 접했을 것이므로 여기서는 조금 다른 화두를 꺼내야겠다. 영화 <그린 북>의 시간적 배경인 1962년이 아닌, 2019년 오늘날에도 지구 어딘가에서는 차별과 불합리가 행해진다. 누군가 피해를 입고 또 누군가는 상처 받는다. 그 차별은 누가 만든 것이고, 차별을 행하는 사람은 모두 나쁜 사람들인가. <그린 북>의 장면 한 페이지를 꺼내본다.


한 공연장에서 인터미션 시간 중 화장실 사용을 원했던 ‘도널드 셜리’(마허샬라 알리) 박사는 장내 화장실이 백인 전용이라 제지당하고는 근처(라기보단 차를 타고 20분이 넘게 걸리는)의 숙소 화장실을 쓰고자 이동한다. 품위와 청결을 중시하는 ‘셜리’는 공연장 바깥에 작게 마련된 간이 화장실을 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를 운전하는 ‘토니 발레롱가’(비고 모텐슨)는 “급하면 차 세워줄 테니 그냥 길에다 싸도 된다”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지만 ‘셜리’에게 그런 건 용납될 리 없다. 대화 중 기분이 상한 ‘셜리’는 ‘토니’ 역시 백인이기에 그를 향해서도 날 선 말을 하고, 이에 ‘토니’의 대답은 ‘셜리’의 기분을 더 긁어놓는다. “난 이탈리아인이지만 이탈리아 사람이라 피자나 파스타 좋아한단 소리 들어도 기분 하나도 안 나빠요.”


이민자 가정이지만 뉴욕 브롱스에서 평생을 자라 가정을 꾸린 ‘토니’는 흑인이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어떤 일들을 겪고 감내해야 하는지에 대해 실상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러니까 ‘셜리’에게 그가 하는 말에는 적어도 악의가 없다. 그럼에도 이는 무지에서 비롯한 것이고, 그 무지는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 그런 의미에서 ‘셜리’의 운전기사(겸 보디가드) 일을 위해 미국 남부 지역으로 떠나게 되는 여정은 ‘토니’에게 눈을 새로 뜨게 만들 정도의 경험을 안겨줄 수밖에 없다. ‘셜리’ 역시 자신이 자청해서 남부 투어를 택한 것이지만 짐작했던 것 이상의 일들을 겪으면서 삶에서 진정 필요한 용기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3개의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고 음악가로 성공했지만 ‘셜리’는 일상적 차별을 겪으며 마음의 문을 얼마간 스스로 닫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가 품위에 신경 쓰는 것 역시 그 때문이다) 진정 가치 있는 여정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것들을 겪게 하고, 보고 듣지 못했던 것들을 접하게 해주는 것이겠다.


영화 <그린 북> 스틸컷


<그린 북>에 대해 짧게 남긴 일기에 “토니가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이라서 이런 소통이 가능했다는 생각도 들었다.”라는 덧글이 달렸다. 일리 있는 말이다. ‘WASP’로 칭해지는 ‘백인’이었다면 ‘토니’처럼 생활비가 필요해서 누군가의 운전기사 일을 하게 될 일도 없었을 테고, 있게 되었더라도 영화 속 ‘토니’가 느낀 바와 같은 체험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번뿐인 삶에서, 혼자의 생을 넘어 누군가와 ‘우리’가 되어볼 수 있다는 것, 그로 인해 나 혼자였다면 결코 하지 않았고 할 수 없었을 경험을 하게 된다는 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린 북>은 무지가 그 자체로 죄는 아니지만 어떤 무지는 죄가 될 수도 있다고 말하는 영화다. <그린 북>은 우물에만 갇혀 있지 말고 어디로든 미지의 장소로 생의 경험을 이끌어야만 한다고 말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한편 <그린 북>은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순수한 선의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 영화다.


수백 년 전에야 상당수의 사람들이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평생을 보냈다고 하지만, 오늘의 세상처럼 ‘여행’이 쉬웠던 때가 과연 있었을까.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아주 틀리지는 않겠지만 그 자체로 시야를 좁히는 말이라고 믿는다. 차라리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삶은 딱 경험한 만큼의 앎만을 가져다준다고. 그러니, 더 많이 알기 위해선 알을 깨고 나와 혼자의 세상 밖으로 나와야만 한다고. 그러니까, 경험한 만큼만 안다고 말이다. 뉴욕에서 시작해 앨라배마까지, ‘셜리’와 ‘토니’ 모두 굳이 떠날 일은 없었지만 서로가 함께임으로 인해서 가능했던 영화 속 두 사람의 그 많은 변화들을 떠올리면서.


영화 <그린 북> 스틸컷


*<그린 북> 리뷰 '품위 있는 코미디의 여정이 내내 담고 있는, 선한 온기':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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