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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Jun 11. 2019

자존과 공존이 함께 가능한 방법은 없을까요

영화 <소공녀>(2017)


국민일보와 대학내일 20대연구소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대학생이 살 집을 구할 때 형편에 따라 포기하거나 타협하는 것에는 몇 가지 순서가 있었다. 우선 집의 면적이 좁아지거나 주거를 공유(셰어하우스)해서 비용을 줄인다. 혹은 형편에 맞는 곳을 찾느라 통학/통근거리가 길어지게 된다. 그 다음에는 화장실이나 세탁실 같은 공간을 공동 사용하게 되는 곳을 찾는다. 혹은 주변 편의시설과의 접근성을 포기하거나, 경비실 혹은 건물 로비의 도어락 같은 치안을 희생하기도 한다. 나중에는 방음이나 통풍 상태가 좋지 않은 곳에 살게 되고, 나아가 옥탑방이나 반지하 같은 곳이 선택지가 된다. '일단 한 몸 누울 수 있는 곳' 외의 나머지 조건들을 월세에 맞춰 하나씩 절충하거나 포기하게 된다는 의미다.


영화 <소공녀> 스틸컷


앞서 살핀 것이 대강의 현실적인 경제관념에 따른 선택이라 할 수 있다면 전고운 감독의 영화 <소공녀>(2017)의 주인공 '미소'(이솜)는 나머지를 그대로 둔 채 아예 집을 포기한다는 점에서 반대의 경우일 것이다. 이는 애써 실제적인 여건을 충실히 따르지 않고도 주인공의 캐릭터를 어떻게 구축하느냐에 따라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전달력이 달라질 수 있음을 믿는, 영화의 과감한 선택으로 보인다.


한데 단지 '미소'가 현실감각이 없고 '한솔'(안재홍)에게 언급하듯 "이대로가 좋아서" 위스키와 담배를 포기하지 않는 건가? 기호식품이면서 중독의 위험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술담배'는 '미소'에게 단순한 취향과 선호를 넘어서 매일 자신을 살게 만드는 '자존'의 바탕이다. 영화 초반 살던 월세방을 나가기 전, <소공녀>는 여러 차례 일일 생활비 지출 내역을 노트에 쓰는 '미소'를 주의 깊게 보여준다. '미소'는 가사도우미 일을 통한 매일의 벌이에서 소비를 제외하고도 현금흐름을 플러스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이면서도, 앞에서 언급한 '자존'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으로 과감히 월세를 포기한다.


*영화 <소공녀>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소공녀> 스틸컷


집을 나서며 '미소'는 친구 집에서 신세를 지기로 결정한 듯하다. 아예 방문할 친구들의 목록과 순서를 작성한 채다. '문영'(강진아) - '현정'(김국희) - '대용'(이성욱) - '록이'(최덕문) - '정미'(김재화)의 순서다. (이때 각각의 인물들을 찾아가는 대목에서 그들의 집 담장 등에 그의 이름과 밴드 활동 당시 악기명이 자막처럼 쓰여 있는데 여기서의 악기 나열 순서(베이스 - 키보드 - 드럼 - 보컬 - 기타)는 그 자체로 유의미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것보다 그들이 생활하는 여건과 '미소'를 대하는 태도가 중요할 따름이다.) 여기서 '미소'를 받아주지 않는 '문영'을 제외하면, '미소'는 '현정'과 함께 하루를 지낼 때 가장 편안한 듯 보인다. 다른 이들보다 '현정'과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는 듯 보인다. 즉, 이야기가 있다. '대용'과 있을 때는 자기 이야기를 거의 하지 못한 채 '대용'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심지어 요리와 청소까지 해준다. '록이'와 있을 때도 마찬가지이며 나아가 도망을 나와야 하는 상황까지 벌어진다. '정미'와 있을 때의 모습은 오히려 '정미'의 이야기가 없는 환경처럼 보이는데 (혹은 이를테면 '부잣집 며느리'의 삶을 연기 중이거나 거기에 도취되어 있거나) 여기서도 '미소' 자신의 이야기는 하지 못한다고 봐야겠다.



영화 <소공녀> 스틸컷


앞서 열거한 이들은 요컨대 '남들과 비슷하게' '남들처럼' 살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다. 반면 '미소'는 자신이 살고 싶은 대로만 산다. 혹은 그러려고 한다. '정미'의 집에 머무르던 중 '한솔'을 만났을 때 '미소'의 말이 잔상을 남긴다. "그런 집에 있으니까 내 집도 아닌데 부자 된 느낌 들어. 기분이 좋기도 하면서 안 좋기도 해." 이 말은, 이렇게 다가온다. '미소'는 넓고 안락한 집에서 사는 게 중요하다기보다 그저 어딘가에서 잠을 잘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 (영화 <기생충>(2019)에서 박사장의 집을 차지한 기택의 가족들이 술을 마시며 이미 자신들의 집이 된 것처럼 행동하는 것과도 대비된다.) '미소'는 '자신의 집이 아닌 데도 부자 된 느낌을 주는 곳'에서는 '안 좋기도 한 기분'을 느끼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한솔'에게 "너랑 위스키랑 담배만 있으면 된다"라고 말하는 건 쓸데없는 낭만에 젖어 있는 게 아니라 정말로 자신의 지금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조건이 그것이라는 말이다.


처음 집에서 '미소'와 '한솔'은 "안 한 지 오래됐다"라며 성관계를 하려 하지만 겹겹이 입은 옷들을 벗자 너무 추워서 "봄에 하자"라며 미룬다. 이때 '하자'는 말과 '하지 말자(미루자)'는 말 모두 '한솔'의 입에서 나오는데, 영화에서 둘은 뒤에 가서 키스만을 나눌 뿐 관계하는 모습은 끝내 보여주지 못한다. 이걸 '미소'가 누군가의 약속보다 스스로와의 약속("내 인생의 목표가 빚 없이 사는 거야")이 더 중요한 사람이고 <소공녀>가 '미소'가 아닌 다른 인물의 주동보다는 오직 '미소'에 주목하기 위한 작은 선택이라고 하면 과한 풀이일까. 아무튼 ''한솔'이 2년간의 파견 근무가 끝나고도 여전히 '미소'와 함께일까' 같은 생각을 하다가 적어도 영화에서 '미소'와 '한솔'은 헤어지지 않았다는 것에 더 주목하기로 했다.


영화 <소공녀> 스틸컷


'미소'는 무엇보다 스스로의 '이너 피스'가 중요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누군가의 얼굴을 붉히거나 상처를 주지 않는 일 역시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미소'는 빚 없이 산다는 목표를 '정미'의 수표를 받지 않음으로써 끝까지 실천하고, "집이 없어도 생각과 취향은 있다"라는 자신의 말 역시 계속해서 지킨다. 빚 없이 살고 싶다는 말은 이런 것들을 포함할 것이다. 타인에게 친절하고 상냥하게 대하기.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숙식을 제공해준 이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 다른 사람을 쉽게 비난하거나 판단하지 않기. (특히 '민지'(조수향)와 같은 사회적 약자 계층에 해당될수록) 그리고 스스로를 연민하거나 비하하지 않기. 요즘 같은 개인주의적 사회에서 자신을 포함한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으려 애쓰는, 곧 자존과 공존을 동시에 이루는 삶은 제목처럼 너무나 동화 속 세상에서나 가능한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는 프란시스 호지슨 버넷의 『소공녀』가 어떤 내용인지 세세히 기억하지 못하지만 이것이 국내에서 주로 아동용 동화로 읽힌다는 점이 영화 <소공녀>의 제목에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추측을 한다.



'미소'가 친구들의 집에 가는 건 본인이 언급하듯 자신이 과거 친구들을 재워줄 때 "아무것도 불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 밴드 활동을 할 때의 기억이다. 과연 '미소'가 만나는, '문영'부터 '정미'에 이르기까지의 옛 밴드 멤버들이 과거의 기억을 지금의 삶에서 얼마나 간직하고 있는가. '미소'가 결국 '정미'의 집을 나오는 건 '정미'가 "아무리 넓은 집이어도 누군가 (손님이) 있을 때는 신경이 쓰인다"라고 말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각각의 인물들의 집을 나오면서 '미소'는 잊지 않고 사진이나 편지를 남기지만, 정작 '미소'가 있을 때는 옛 밴드 멤버들은 과거의 기억에 잠시 동요하는 것처럼은 보여도 '미소'의 처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않는다. 오로지 '미소'가 없을 때, '록이' 아버지의 장례식 때에만 '미소'의 빈자리를 확인할 따름이다. 결국 백발의 '미소'는 자존의 방법만 지켰을 뿐 공존의 길은 찾지 못했다.


'사회적 동물의 바람직한 삶'이라는 건 자신은 물론 타인에게 쉽게 상처 주지 않는 삶이라는 생각을 여전히 갖고 있지만 '소공녀'는 동화에만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미소'가 텐트에서 잘 지언정 여전히 (한강 다리와 같은) 우리의 일상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 역시 중요하다. 영화 <소공녀>가 이 '이상한 나라의 미소'를 세속으로부터 떠나지 않게 했다는 선택은, 우리가 이 사람들의 삶이 곁에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지켜봐야 하고, 가능하다면 보듬어야 한다는 선언 같은 것이 아닐까. 영화를 통틀어 가장 소중한 장면을 하나 골라야 한다면 나는 '미소'가 '민지'의 이야기를 듣더니 함께 밥을 먹자고 하고 '민지'가 먹고 싶다고 한 닭백숙을 함께 먹는 장면을 언급해야만 하겠다.


영화 <소공녀> 스틸컷


토끼 굴에 빠져든 백 년 전의 앨리스와

돈에 쫓겨 반지하로 꺼져 든 앨리스들과 만났다


생의 반이 다 묻힌 반지하 인생의 나는

생의 반을 꽃피우는 이들을 만나 목련 차를 마셨다


서로 마음에 등불을 켜 갔다


(신현림 시 '반지하 앨리스' 전문,

시집 『반지하 앨리스』에서, 민음사, 2017)


영화 <소공녀>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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