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걸어도 걸어도>(2008)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영화 <걸어도 걸어도>(2008)의 각본을 처음 쓰기 시작할 때 '인생은 언제나 조금씩 어긋난다'라는 문장을 마치 서문처럼 적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에세이 『걷는 듯 천천히』(문학동네, 2015)에서 "작가란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부자유스러움을 받아들이는 존재"라는 이야길 한다. 빈자리와 공백을 남겨둔 채로 함께 걸어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이 영화를 보고, 우리는 저마다의 생각과 감정을 꺼낸다. "늘 이렇다니까. 꼭 한 발씩 늦어."라는 영화 속 '료타'(아베 히로시)의 말은 어쩌면 이 영화의 모든 것이다. 영화 속 인물의 과거와 영화의 현재, 그리고 영화가 끝난 후 영화 바깥의 미래가 마치 하나의 이야기처럼 다가오는 <걸어도 걸어도>의 일상은 그 자체로 영화가 선사할 수 있는 하나의 마법처럼 다가온다.
독립책방 [생산적헛소리]의 '비밀영화탐독' 5월 작품으로 이 영화를 골랐다. 모임 전날 영주에 다녀오면서, 여정 내내 이 영화를 생각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지만 마음대로 안 될 때도 있겠지."라는 '료타'의 말 역시 영화의 많은 것을 담는다. '걸어도 걸어도 작은 배처럼 나는 흔들려'라는, 노래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의 가사 역시 많은 것을 의미한다. 모든 것을 담고 있지는 않겠지만, '가족이니까' 들키기 싫은 비밀, '가족이니까' 차마 하지 못하는 말들이 <걸어도 걸어도>에는 있다. '나는 부모님처럼 살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으면서도 어느새 그의 많은 것을 닮아 있기도 한 인물이 가족을 겪고 가족을 떠나보내고 새 가족을 맞이하며 성장한다. 그런 '료타'를 보며, 그가 재혼해 얻은 아들 '아츠시'(다나카 쇼헤이) 역시 한 걸음 자란다. 누구에게나 하나쯤 있을 '숨어서 듣는 노래'를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관계의 풍경 속에서 단지 자신의 이야기를 고백하는 일만으로도 꺼내보이게 만든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일흔을 넘겼지만, 아직 그때는 건강하실 때였다. 언젠가 그분들이 먼저 돌아가시리라는 것은 물론 알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언젠가'였다. 구체적으로 내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는 상황을 상상하지는 못했다. 그날, 무언가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수면 아래에서는 여러 가지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고, 나는 이를 눈치채고 있었다. 그럼에도 모른 척했다. 나중에 분명히 깨달았을 때는, 내 인생의 페이지가 상당히 넘어간 후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때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미 돌아가신 뒤였기 때문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걸어도 걸어도』, 박명진 옮김, 2017, 민음사, 10쪽.
영화를 감독이 직접 소설화한 책에서는, 끝무렵 '료타'의 내레이션이 한 번 등장하는 영화와 달리 '료타'의 위와 같은 회고가 소설 초반부터 수시로 등장한다. 그러니까, 이건 '지나간 것에 대한 이야기'이며 '지나간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다. 앞서 말한 '세계의 부자유스러움'이란 무슨 의미일까.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세계 전체를 축약하는 듯한 이 말은 <걸어도 걸어도>에서도 역시 나름의 중요한 뜻을 짐작할 수 있다. 하나는, 일반적인 '가족영화'(온 가족이 볼 수 있는 영화, 혹은 가족의 재결합 혹은 가족질서 회복을 직, 간접적으로 담고 있는 영화) 속 가족들의 모습 혹은 그 영화가 그리는 가족의 이야기가 그 자체로 너무 영화적인 것일 수 있다는 생각.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고 썼던 신형철의 문장처럼(『정확한 사랑의 실험』, 2014, 마음산책) 현실세계의 사람들은 저마다 선한 면도 가지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면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다른 하나는, 일종의 기승전결의 구조를 가진 일반적인 영화의 특성상 그 영화가 제기하거나 가져온 갈등은 결말에 이르러 해소되거나 봉합되기 쉬운데, 가족 간의 갈등이나 오해 혹은 앙금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해소되지 않는다는 것.
<걸어도 걸어도>는 가족질서의 회복을 말하거나 '가족이니까 서로 다 이해하고 끌어안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럴 생각도 없어 보인다. 다만 살아갈 뿐이라는 말 외에는. 중요한 대목임을 쉽게 알 수 있을 만큼 <걸어도 걸어도>는 계단을 오르내리거나 길을 걷는, 무엇보다 둘 이상의 사람들을 함께, 그것도 오래 보여준다. 함께 걷는 그들 사이에는 간격이 있다. 아버지와 아들은 약간 떨어져서 걷고, 노부부도 조금 떨어진 채 걷는다. 부부와 두 자녀는 둘둘씩 짝을 지어 조금 간격을 두고 걷는다. 각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그러면서 이따금 뒤를 돌아보며, 가끔씩 멈춰서 뒤에 오는 사람을 기다리거나 딴청을 피우기도 하면서. 어쩌면 가족은 그저 '함께 걷는 사람'일 뿐인 것이다. 같은 방향으로 간다고 해도 속도가 다를 것이며, 같은 속도로 보폭을 맞춰 걷는다 해도 서로 바라보는 방향이나 목적지가 다를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늘 한 걸음씩 늦고, 누군가는 멀어지려 해도 가까워져 있으며, 또 누군가는 조금 앞서 나간다.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가족의 모습을 그대로 담아온 듯 고르게 살아 있는 배우들의 연기와 함께, <걸어도 걸어도>의 가족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곳에 발을 딛고 있다. 누군가를 저마다의 이유로 잃은 수많은 가족들의 한 단면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자신이 방송사 입사 초기 한 선배에게 들었다는 말처럼, 단 한 사람을 위한 이야기를 만들었다. 그 한 사람은 물론 바로 자신인데, 본인의 부모에 대한 기억과 감정을 생생히 영화 속 캐릭터에 녹여냄으로써 <걸어도 걸어도>가 보여주는 삶의 단면은 그 인생 전체를 들려주는 것보다 더 입체적이고 가까우며 사려 깊다. 가족들은 시간이 오래 지나도, 세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서로의 빈자리와 간격을 둔 채 그저 걸음을 이어간다.
(★ 10/10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