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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Jun 28. 2018

당신은 이미 '쓸 만한 인간'이니 계속 이야기를 써보자

<변산>(2018), 이준익

'내 고향은 폐항
내 고향은 가난해서 보여줄 끄 노을 밖에 없네'

(영화 속 '학수'가 고교 시절 쓴 시의 일부)


변산에서 자란 소년은 가족을 등지고 서울로 떠났다. 두 평 짜리 고시원에서 두 다리도 제대로 뻗지 못하고 몸을 구부린 채 소리 죽여 노래를 만들며 낮에는 발레파킹 일을 하는 소년, 이제는 청년. '학수'(박정민)는 오디션 프로그램 [쇼 미 더 머니]에 여섯 시즌째 출석하고 있다. 이번에도 예선 탈락을 한 '학수'는 어느 날 서울에서 고향 친구들과 마주치고, 때마침 고향으로부터 온 전화를 받는다.


자신의 삶을 '빡세'다고 느끼는 순간은 하고 싶고 되고 싶은 것을 이루지 못했을 때가 아니라 '남들처럼' 사는 것조차 어렵다고 느낄 때가 아닌가 싶다. 오디션에도 여섯 번 정도 나가다 보면 나는 재능이 없는 건가 싶어질 것이고, 고시원 벽 너머로 옆방 사는 이의 욕설을 들을까 혼잣말도 하지 못할 때면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가 싶어질 것이다. 지나가며 스치는 남들의 평범해 보이는 단란한 일상을 보면 나에게도 과연 가족이라는 게 있었을까, 있을 수 있을까, 싶어질 것이다. 다른 사람처럼 사는 건 언제나 그렇게 어렵다. 나답게 살기란 더 어렵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그게 나인지를 헤아릴 길 없기 때문이다.


영화 <변산> 스틸컷


영화 <변산>의 제목이 '학수'가 나고 자란 지명인 점은 그래서 더 주목해야 한다. 짧지 않은 시간을 성장하게 한 곳이지만 동시에 자신을 불행하게 만든 곳이라고 여기게 된, '고향'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게 된 곳. 스스로의 정체성을 타인으로부터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결핍으로서가 아니라, 외로움으로서의) 자신을 다시 부른 그곳 변산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학수'에게 한결같이 비협조적이다. 친구도, 선배도, 부모도 '학수'에게는 떠나고 싶고 외면하고 싶은 그늘일 뿐이다. 말하자면 흑역사다.


그런 '학수'를 지켜봐 온 소녀가 있다. 변산에서 자란 소녀는 여전히 변산에 남아 풋풋한 기억을 추억 삼아서 글을 쓴다. '선미'(김고은)에게 고향은 '학수'와는 달리 지금도 자신을 살게 하는 터전이지만 이루어지지 못한 첫사랑의 기억은 글 쓰는 일의 원천은 될지언정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마음 한구석을 쓰라리게 한다. '선미'에게 변산이라는 공간은 흑역사는 아니겠지만 시련을 안겨준 곳이기도 할 테다.


영화 <변산> 스틸컷


<변산>은 쉽게 가르치려 하거나 무작정 위로부터 꺼내들지 않는 영화다. 영화에서 벌어지는 많은 갈등은 가족이기 때문에 발생하고 친구이기 때문에 깊어지지만, 그것들을 전개하고 봉합해가는 과정은 '가족이니까', '친구니까'의 당위가 아니라 오히려 그 원인과 폐부를 하나씩 깊게 파고듦으로써 이루어진다. 게다가 자신이 그토록 외면하고자 했고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것들을 다시 겪음으로써 일어나는 일들이 영화의 주된 내용이 된다. 타인이나 세상을 향하는 것처럼 보였던 울분은 실상 그럴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자신을 향한 것이며, 그 분노는 '표출'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표현'으로 다듬어진다. 감정이 고조되는 매 순간 삽입되는 '학수'의 노래는 극의 흐름을 끊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가 느끼는 기분을 완곡히 그러나 빠짐없이 반영한다.


끊임없이 화내고, 방황하고, 싸우던 영화 속 인물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떠나거나 등지거나 잊어야 했던 관계들 속에서 고향이라는 공간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해간다. '학수'는 한때나마 시를 쓰게 했던 노을 말고는 변산에 아무것도 없다고 여겼지만 그렇기만 한 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고, '선미'는 담아두기만 해야 했던 마음 하나를 그 노을을 다시 마주하면서 꺼낼 수 있게 된다.


영화의 제목보다 더 눈여겨봐야 할 점은, '학수'도 '선미'도 모두 '쓰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학수'의 랩은 가사를 쓰기 위한 펜과 노트, 그리고 솔직한 이야기를 담아내기 위한 자신의 발견이 있어야 하며 목소리와 비트를 끊임없이 점검하고 돌아봐야 한다. '선미'의 소설은 자신과의 끝없는 대화를 통해서만 완성되며 자전적 이야기에서 문학적 성취를 이루기 위해 부끄럽다고 여겼던 과거를 무한히 반복 재생해야 한다. 발화하기에 앞서 먼저 쓰는 사람의 언어는 그래서 가볍지 않다. 가벼운 것처럼 보일지라도 안에는 반드시, 그 노래, 그 소설을 써 내려가야만 했던 보이지 않는 고백이 있음을 헤아려야 한다.


영화 <변산> 스틸컷


삶을 고쳐 쓴다는 것의 의미는 바탕을 완전히 지우고 처음부터 새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내 삶은 이렇게 평생 '남들처럼'도 못 되고 하고 싶은 것도 이루지 못하고 그저 불행하기만 할 거라고 주저앉는 대신, 내가 앉은 자리가 과연 어디인가를 치열하게 둘러보고 바로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없던 것을 고쳐 쓰는 게 아니라 있는 것에서 조금 다른 방향을 찾아내는 것이다. '학수'와 '선미'가 영화 <변산>에서 보여주는 건 바로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건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포장이 아니라 날것의 존재다. '넌 있는 그대로 무조건 괜찮아'가 아니라, '넌 여기까지가 아니라 조금 더 멀리 걸을 수 있어'인 것이다. 영화 중반 '학수'와 '선미'가 길을 걷다 만나는 어느 버스킹 뮤지션의 노래엔 이런 가사가 등장한다. '이 노래 사랑 노래 / 멍든 내가 부르고 있네 / (...) / 목 놓아 부르는 노래' 멍 들어본 사람은, 아픔을 앓아본, 아픔을 알아본 사람은 사랑을 더 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는 것도 마찬가지리라. 주저앉아본 사람은, 다시 일어날 수 있다. 다시 일어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손도 잡아줄 수 있겠다.


'학수' 역을 연기한 배우 박정민은 자신의 책 [쓸 만한 인간]에서 이렇게 말해놓았다. "살아있는 한, 언젠가는 나도 각도 큰 변화구를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도 앞으로 계속 살아가시길 바란다. 직구만 던지면 얻어맞기 일쑤니, 적절히 변화구도 섞어 가면서 살아가시길 바란다. 사는 데 9회말이 있는가. 역전패 같은 것도 없을 것이다. 당신도 누군가에게는 의외로 잘 살아가고 있는 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길 때까지 그렇게 계속 살아가시길 바란다. 당신 지금 아주 잘하고 계신 거다." (65쪽, 상상출판, 2016.) 내게는 노을 밖에 없다고 여겼던 세상이, 누군가에게는 곧 전부가 될지도 모르니까. 삶에 행복만 있다는 건 명백한 거짓말이다. 그러나 이따금 행복도 그 빛을 드러내리라는 건 진실이다. 청춘은 이름처럼 아름답지 않겠지만, 내가 선 이 자리에서 끝 모른 채 자신의 이야기를 고쳐 쓰고 끝없이 계속 살아봐야만 하는 이유는 그런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니 당신의 이야기도 멈추지 않고 계속 쓰였으면 좋겠다. (★ 8/10점.)



영화 <변산> 메인 포스터

<변산>(2018), 이준익

2018년 7월 4일 개봉, 123분, 15세 관람가.


출연: 박정민, 김고은, 장항선, 고준, 신현빈, 정규수, 김준한, 정선철, 배제기, 최정헌, 임성재 등.


제작: 변산문화산업전문유한회사

제공/배급: 메가박스(주)플러스엠


영화 <변산> 스틸컷

*브런치 무비패스 관람 (2018.06.26 메가박스 동대문)

*<변산> 메인 예고편: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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