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자존감이 데려온 관계의 결말
내 첫 연애 이야기는 사실 입 밖으로 꺼내기조차 싫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트라우마로 남아버린 관계였다.
그 사람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불편하고, 연애라는 단어가 주는 설렘도 그때나 지금이나 온전히 사라져 있다. 지금도 그 시절을 생각하면 ‘악몽’이라는 표현이 제일 적당하다.
내 첫 연애 상대도 프랑스인이었다. (물론 지금의 남편은 아니다.)
연애 기간만 놓고 보면 3년 가까웠지만, 제대로 함께 보낸 시간은 6개월에서 1년 남짓. 나머지는 전부 장거리였다. 멀리 떨어져 있었음에도 우리는 거의 매일 싸웠다. 울고, 소리치고, 지치고, 다시 싸우고… 끝없는 반복이었다.
몇 번이고 “이제 정말 끝내자”라고 했지만 그는 늘 이렇게 말했다.
“널 사랑해 줄 사람은 나밖에 없어.”
“나한테는 헤어진 게 아니니까, 네가 다른 사람 만나면 난 사람들에게 네가 바람피운 거라고 말할 거야.”
그 말을 들을 때면 이상하게 두려웠다.
‘정말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은 이 사람뿐일까?’
'혹시 그가 정말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하고 다니면 어떻게 하지…'
이미 낮았던 자존감은 그 말을 틈타 더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그러던 어느 휴일 낮, 시험공부를 하던 중 한 통의 전화가 왔다. 모르는 여성분이었다. 그녀의 입에서 들은 사실은 충격 그 자체였다. 그 똥차 인간은 무려 6개월 동안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었고, 그 외에도 여러 여자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녀가 보내준 사진과 메시지 증거들을 보고 있자니 분노가 온몸을 타고 올라왔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무너진다거나 슬프다기보다는, 나를 가지고 놀았다는 사실이 더 아프고 화가 났다. 헤어지고 각자 삶을 살면 될 일인데도, 그는 나를 이 이상한 관계 속에 묶어 두었고 그 사이 수많은 여자들을 만났다. 내 시간, 감정, 비용… 모든 게 허무하게 느껴졌다.
헤어진 뒤에도 그는 협박 아닌 협박을 이어갔다. 그러다 다행히 친하게 지내던 프랑스인 친구와 그 친구의 변호사 친구의 도움으로 완전히 관계를 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낮았던 자존감은 바닥을 더 깊이 파고 들어갔다.
다음 연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사람 자체를 믿지 못하게 되었으니까.
처음엔 그를 원망했다.
그 인간만 아니었으면, 그 연애에 썼던 시간과 돈으로 더 나은 무언가를 할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왜 그런 사람을 만났을까.
왜 끝까지 헤어지지 못했을까.
그 질문들만 계속 맴돌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 사람만이 아니었다.
나의 낮은 자존감,
‘그래도 사랑이니까’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던 나,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이 어쩌면 내 탓일지도 모른다고 자책하던 나.
그런 내가 있었기에 그 독 같은 관계는 오래 이어졌고, 상처도 그만큼 깊어졌다.
그러나 동시에, 그 경험 덕분에 나는 나를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 연애는 분명 똥차였고 깊은 상처를 남겼지만, 그 상처는 결국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다.
나를 성장하게 한 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상처 속에서도 스스로를 다잡고, 내면을 위로하고, 그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썼던 ‘나’였다
어디에서 본 글인데, 그 문장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나를 성장하게 하는 것은 상처 그 자체가 아니라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져 본 경험이다.
상처를 준 사람이 나를 성장시킨 것이 아니라,
상처를 입었음에도 거기서 벗어난 내가 스스로 성장한 것이다.
@바람구두 (willow_winds)
이제는 그 문장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게 됐다.
나는 상처를 딛고 걸어 나온 사람이고, 그 길 끝에서 결국 나답게 행복해졌다.
그때의 나는 흔들리고 미숙했지만, 지금의 나는 그 시절의 나까지 품어줄 만큼 단단해졌다.
그리고 지금 곁에는, 내가 어떤 사람이어도 존중해 주고 함께 성장해 주는 남편이 있다.
지나고 보니 알겠다.
그 어둡던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의 따뜻한 일상이 더 소중하다는 걸.
다시는 그런 ‘똥차’ 앞에서 머뭇거릴 일도 없을 만큼,
나는 충분히 성장했고, 또 사랑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걸.
예전의 나처럼 똥차 같은 상처에 갇혀 있는 사람이 있다면 꼭 말하고 싶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당신은 누군가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따뜻하고 낭만적인 사랑을 누릴 자격이 충분합니다.”
그 진실을 믿는 순간부터, 삶은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