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시절에는 성악가가 되고 싶었다. 노래가 아닌 공부를 하라는 엄마의 말에 새로운 꿈을 찾았다. 솔직히 이때 말고는 살면서 엄마 말을 들은 적이 거의 없다. 92년생 딸이 살아갈 세상은 62년생 엄마가 살아온 세상과는 많이 달랐다. 안정적인 직장을 갖길 바랐던 엄마의 바람과 다르게 나는 서른이 넘도록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했다. 아직은 인생에서 정해진 길 없이 이곳저곳 기웃거린다.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사람들이 가지 않은 길을 택하고 인생이 달라졌다고 한다. 나는 미련을 남기고 싶지 않아 사람들이 가본 길, 안 가본 길을 다 맛보며 살고 있다. 안 가본 길이 궁금해 갈림길로 되돌아가기도 하고, 엉뚱한 곳으로 새기도 한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에게 말을 걸고 조언을 구하기도 한다. 그렇게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도 한다.
나의 꿈은 계속해서 바뀌었지만, 중학생 때에는 밤하늘의 별을 연구하는 천문학자가 되고 싶었다. 별은 초기질량에 따라서 삶의 궤적이 달라졌다. 질량이 큰 별은 밝게 빛나는 대신 수명이 짧다. 생의 마감도 초신성 폭발로 화려하다. 질량이 작은 별은 큰 별만큼 밝지는 않지만 오랜 시간 빛을 내다가 조용히 죽어간다. 이런 별의 일생은 사람의 인생과 닮아 보였다. 사람도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간다. 누구는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화려한 인생을 살지만, 누군가는 큰 주목은 받지 못해도 꼭 필요한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며 그 자리를 지킨다. 사람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일 정도로 저 멀리 우주에 떨어져 있는 별이 사람과 닮아 보이다니, 그렇게 천문학에 빠지게 되었다.
대학에서는 물리학을 전공했다. 천문학을 더 잘 이해하려면 물리학을 먼저 공부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천문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그 근원에는 물리법칙이 있었다. 천문학에 대한 흥미를 간직한 채로 대학을 다니다가, 2학년에는 호주의 퍼스(Perth)라는 도시로 교환학생을 다녀왔다. 마침 그곳에는 국제전파천문연구소(ICRAR, International Centre for Radio Astronomy Research)가 있었다. 교환학기가 끝난 방학, 국제전파천문연구소에서 학부생 연구인턴을 했다. 막상 연구를 해보니 조금은 다른 마음이 피어올랐다. 연구소에서는 컴퓨터 앞에 앉아 밤하늘에서 모은 데이터를 계산하고 분류하는 컴퓨터 프로그래밍 코드를 짰다. 이런 일들은 내가 살아가는 세상과 너무 동떨어졌다고 느꼈다. 내가 고생해서 만들어내는 결과물이 내가 발붙이고 살아가는 이 세상과 조금은 연관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대학을 졸업하면 천문학 전공으로 대학원을 가겠다는 계획은 무산되었다. 천문학 연구가 내 생각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대학교 3학년 여름방학, 국제통계물리학회(STATPHYS)에서 안내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3년마다 열리는 큰 국제학회가 2013년 마침 서울대학교에서 열렸다. 학부 전공을 다 마치지도 않았는 데다가 한국어로 들어도 어려운 물리를 영어로 들으니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렇지만 기조강연에서 보았던 새들이 무리 지어 날아다니는 장면만은 뇌리에 박혔다. 그 장면을 처음 보았을 때, ‘물리학에서 저런 연구도 한다고?’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통계물리학이 뭐길래 저런 연구를 다하나 싶어 통계물리학을 연구하는 교수님들이 쓰신 책을 찾아 읽어봤다. 김범준 교수님이 쓰신 <세상물정의 물리학>, 최무영 교수님이 쓰신 <최무영 교수의 물리학 강의>등을 뒤적이다 보니 가장 추상적이고 일상에는 관련이 없을 것 같이 보였던 물리학이 어쩌면 우리 일상에 가까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대학원에서 통계물리학을 전공해 석사학위를 받았다.
92년생의 세상 탐방기
과학과 우리 삶이 맞닿아있는 지점을 발견하려는 노력은 계속되어, 과학과 사람을 연결하는 일로 이어졌다. 대학원을 졸업할 무렵 한국과학창의재단에서 운영하는 과학문화 전문인력(과학 커뮤니케이터) 양성과정을 수료했다. 수료 후에는 강연과 글을 통해 내가 발견한 과학과 우리 삶의 연관성을 전하고 있다. 또 사람들이 과학을 보다 친근하게 접할 수 있도록, 수료생들과 함께 과학을 접목한 타로카드를 만들었다. 타로는 점을 볼 때 사용하는 카드인데, 카드 그림과 해설에 과학적 개념을 담았다. 예를 들어 6번 연인 카드에는 전자기유도 그림을 넣었다. 전자기유도는 자석이 코일에 가까워지면, 자석을 밀어내는 전류가 코일에 유도되는 현상이다. 반대로 자석이 코일에서 멀어지면 자석을 끌어당기는 전류가 코일에 유도된다. 이를 연인 간의 밀고 당기기로 봤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성급하게 다가가면 오히려 멀어질 테니,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멀리 보라는 해설을 담았다. 카드 해설을 하며 과학적 개념을 설명해 주면 과학을 조금을 말랑하게 받아들인다. 여담이지만 은근히 점사가 맞을 때가 많아 신기하다.
대학원을 졸업한 뒤에는 과학 커뮤니케이터로 활동하면서, 동시에 우리 사회에 과학기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인 사단법인의 사무국에서 일했다.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Engineers and Scientists for Change), 줄여서 ESC에서는 과학문화, 과학교육, 다양성, 지구환경&에너지 등의 분야에서 과학과 우리 사회에 연결다리를 놓는 여러 활동을 한다. ESC는 대학원을 다니면서 후원하기 시작했는데, 대학원을 졸업할 즈음 사무국에서 회계를 맡을 사람을 구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릴 적부터 용돈기입장을 착실히 썼던 경험과, 숫자에 대한 거부감이 없다는 자신감으로 선뜻 회계라는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였다.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 내 전문성을 회계로 정했느냐 물으면 또 그런 것은 아니다. 내가 ESC에서 일했던 이유는 회계라는 직무 때문이 아니라, ESC가 과학과 사람을 연결하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책을 통해서도 과학과 사람을 연결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출간된 좋은 과학책을 발굴하고 함께 읽는 과학책 모임(https://www.instagram.com/haeji_bookclub/)을 이어오고 있다. 같이 읽은 과학책에 한줄평과 평점을 매겨 인스타그램에 공유한다. 꾸준히 좋은 과학책을 발굴해서 과학책을 읽고자 하는 사람들이 참고할 수 있는 계정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공교롭게도 모임원이 모두 물리학 전공자인 덕분에 읽는 책과 평점에 편향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누군가에게는 쓸모 있는 목록이지 않겠는가? 또 틈틈이 영문으로 출판된 과학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번역은 우리나라 독자들이 좋은 과학책을 접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 과학과 사람을 연결하는 일이다. 과학의 발전이나 영향력, 과학자의 경력 등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살펴보는 분야 ‘과학의 과학’ 전반을 소개하는 책 <과학의 과학>을 번역했다. 또 번역할 책이 없나 출판시장을 기웃거린다.
이렇게 다양한 영역에 발을 걸쳐 종잡을 수 없는 인생의 궤적에서 한 가지 변하지 않는 점은 계속해서 과학과 삶의 연결지점을 찾고, 과학과 사람을 연결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때로는 누군가의 발자취를 따라 걸어가기도 했고, 때로는 나만의 길을 개척했다. 매 순간 고민의 연속이었다. 어느 방향으로 향할지 고민했고, 길을 가면서도 이 길이 맞나 고민했고, 길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건지 고민이 들 때마다 대학원에서 배웠던 통계물리학이 떠올랐다. 통계물리학은 세상을 탐방하며 쌓인 경험을 나만의 독특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도록 도와주었다.
통계물리학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
통계물리학은 물리학의 한 분야로 물질을 이루는 분자나 원자의 집단적인 특성을 파악한다. 방 안의 공기 분자나 자석이나 금속을 이루는 원자는 그 수가 워낙 많기 때문에, 하나하나의 특성보다는 전체를 아울러 파악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그 과정에서 많은 수의 집단적인 특성을 파악하는 통계적인 방법이 유용하게 사용되었고, 이런 분야를 통계물리학이라 부르게 되었다. 통계물리학은 특히 원자나 분자 등 구성요소들이 서로 상호작용하여, 그 결과로 집단적인 특성이 나타나는 상황에 관심이 있다.
이렇게 상호작용을 중심으로 대상을 이해하는 방식은 동물이나 사람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내가 학회 기조강연에서 보았던 것처럼, 새들이 무리 지어 날아다닐 수 있는 이유는 새들이 서로의 속도에 맞추어 자신의 속도를 조절하기 때문이다. 새들은 옆에 있는 새의 속도를 참고하는 식으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사람도 영향을 주고받는다. 간단하게는 점심으로 짬뽕을 먹을지 짜장면을 먹을지 정할 때 같이 가는 사람은 무얼 먹는지 참고한다. 친구가 아이폰을 사면 따라 사고 싶고, 이번에 나온 무슨 영화가 재미있다고 하면 그 영화를 찾아보기도 한다. 이렇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다 보면 사회 전체적인 현상이 생겨나기도 한다. 코로나 같이 질병이 유행할 수도 있고, 어떤 영화나 새로운 디저트가 유행하기도 한다.
통계물리학은 물리학답게 문제를 단순하게 본다. 뇌신경 세포이든, 사람이든, 원자이든 일단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존재로 단순화하고, 누가 누구와 어떤 방식으로 상호작용하는지 따지다 보면 공통적인 원리가 드러난다. 또 한쪽에서 발견한 의미를 다른 쪽에 적용해 볼 수도 있다. 뇌신경 세포의 연결 구조에서 변방의 떠돌이로 살아가는 내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기도 했고, 팔랑귀로 살아가는 내가 사회적 의견을 형성하는데 어떤 도움이 되는지도 깨달았다. 또 불합리한 결혼 비용은 사실 관광지의 비싼 물가와 같은 원리로 형성되었다는 점도 발견했다. 얼핏 생각하기에 물리학은 일상과는 별로 접점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상호작용을 중심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통계물리학의 관점에서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도 모두 물리학의 주제가 될 수 있다.
이 책에는 92년생 물리학도가 세상을 탐방하면서 발견한 일상과 통계물리학의 접점을 담았다. 과학과 사람을 이으려는 또 하나의 시도이다. 또 90년생과 그 밖의 세대를 이으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여러모로 이 책이 세상을 연결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물리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물리학의 또 다른 매력을 알려주고, 새로운 세대가 당혹스러운 사람에게는 90년생이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들려줌으로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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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다해(https://linktr.ee/dahae.roh)
92년생으로 Z는 낯선 M세대. 재미를 좇아 살고 있다. 어느덧 서른을 넘었지만, 아직도 정해진 길 없이 세상을 탐험하고 있다. 하고 싶은 것, 재미있어 보이는 것은 다 하고 살자는 주의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데, 책을 써서 이름을 남기려고 한다. <90년생이 온다>라는 기념비적인 책이 나온 지 6여 년이 지난다. 이 사회에 새로운 충격을 주었던 90년생이 전해주는 90년생 이야기가 더 많이 세상에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