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열린사고의 소유자 일지도
한동안 짬뽕에 빠져있었다. 기회가 되면 새로운 중국집의 짬뽕을 맛보려 시도했는데, 종종 아니 꽤 자주 애초의 의도를 저버리고 다른 메뉴를 먹곤 했다. 회사 근처에 중국집을 방문할 때면 같이 방문한 이의 추천에 따라 메뉴를 바꿨다. 하루는 누군가가 ‘여기는 우동이 맛있다’고 했고, 또 다른 이는 ‘여기는 짬뽕보다는 짜장면이 더 맛있다’고 했다. 그때마다 나는 같이 간 사람의 말에 따라 메뉴를 바꾸었다. 이미 눈치챘겠지만 나는 팔랑귀이다.
나의 팔랑귀 일화는 또 있다. 나는 자타공인 뜨죽따(뜨거워 죽어도 따뜻한 음료)였다. 더운 여름날에도 차가운 음료를 마시는 건 영 내키지가 않았다. 그렇지만 내가 가장 자주 같이 밥을 먹고 카페에 가는 당시 나의 짝꿍은 얼죽아(얼어 죽어도 아이스 음료)였다. 한 겨울에는 따뜻한 장갑을 끼고서라도 꼭 아이스 음료를 마셨다. 정말 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고집하는 그가 어쩌면 냉혈인간인 게 아닐까 의심해보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은 짝꿍뿐만이 아니었다.
대학원을 다니던 시절, 연구실 선후배는 모두 얼죽아였다. 인간은 약 36.5℃로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정온동물이다. 더운 여름에는 그럴 수 있지만 어떻게 추운 겨울에도 차가운 음료를 마시면서도 체온을 유지하다니, 이것이야 말로 인체의 신비가 아닐까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깨달았다. 겨울에 아이스 음료를 먹어도 사람이 진짜 죽지는 않는구나.
그래서 하루는 추운 겨울날에 차가운 음료를 한 입 얻어먹어보았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차가운 음료가 주는 고유의 청량감이 있었다. 어쩌면 당연한 소리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한 두 입 얻어먹기를 반복하니, 나의 미래 남편은 나에게 외쳤다. ‘이럴 거면 그냥 너도 아이스로 마셔!’ 뜨거운 음료를 시켜놓고, 적당한 온도로 식기를 기다리는 동안 남편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홀짝거리곤 했다. 그렇게 남편의 커피를 다 먹으면, 얼음을 리필해서 한 때는 뜨거웠던 나의 커피를 부어 먹었다. 그러니 그럴 만도 하다.
통계물리학이 말하는 선택의 순간
우리는 살면서 수도 없이 많은 선택의 순간을 마주한다. 간단하게는 짬뽕이냐 짜장면이냐에서부터 시작해서, 정치적으로 어떤 당을 선택할지의 문제까지 다양한 주제에서 또 다양한 무게의 선택을 내린다. 오죽하면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인생은 B(irth)와 D(eath) 사이의 C(hoice)라고 했겠는가. 이런 선택의 순간에서 우리는 서로의 의견을 참고한다.
우리가 옆에 있는 사람의 의견을 따른다면 금속은 옆에 있는 자석의 자기장을 따른다. 자석에는 N극과 S극이 있는데 이 둘은 항상 같이 다닌다. N극이 있으면 반드시 S극이 있기 마련이다. 자석을 아무리 작게 쪼개도 N극과 S극이 있다. 이렇게 짝꿍처럼 함께 다니는 N극과 S극을 묶어서 자기 쌍극자라고 부른다.
금속처럼 자석에 붙는 물질들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자기 쌍극자들이 많이 있다. 보통 금속의 자기 쌍극자들은 규칙 없이 방향이 뒤죽박죽이다. 그러나 자석 옆에 가면 자석이 만들어내는 자기장에 맞추어 금속 내부의 자기 쌍극자들이 정렬된다. 그러면 금속은 자석에 착 달라붙는다. 이렇게 그 자체로 자석은 아니더라도, 주변에 자기장이 있을 때에 자성을 띠는 물질을 상자성체라고 부른다.
자기 쌍극자들이 알아서 방향을 맞추면 자석이 된다. 자석의 자기 쌍극자들은 서로가 서로를 참고해서 방향을 정렬한다. 마치 우리가 짜장면을 먹을지, 짬뽕을 먹을지 고를 때 옆 사람의 의견을 참고하듯이 말이다. 이를테면 자석은 모두가 짜장면을 먹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자체적으로 자기 쌍극자들이 정렬되어 주변에 자기장을 만들어내는 물질을 강자성체라고 부른다.
그렇지만 온도가 높아지면 강자성체도 자성을 잃고, 상자성체가 된다. 강자성체의 자기 쌍극자들은 온도가 낮을 때에는 서로를 신경 쓰며 방향을 맞추지만, 온도가 높으면 제각기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그러면 자석은 자성을 잃는다. 옆에 금속이 와도 달라붙지 않는다. 자석이 자성을 잃는 온도는 이 현상을 발견한 마리 퀴리의 남편, 피에르 퀴리의 이름을 따서 퀴리 온도라고 부른다. 퀴리온도 보다 온도가 낮을 때는 메뉴를 모두들 짜장면으로 통일하지만, 퀴리온도보다 높으면 제각기 짬뽕이나 짜장면을 선호대로 고르는 셈이다.
통계물리학자들은 온도에 따라 자석이 자성을 갖기도, 잃기도 하는 모습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했다. 사람도 주변의 의견을 참고하기도 하고, 주변의 의견에 관계없이 자기 의견을 고집하기도 한다. 우리는 주변인들의 의견에서 다수 의견을 따를 수도 있다. 아무래도 좀 더 많은 사람이 지지하면 좀 더 나은 선택지이지 않을까 짐작하는 방식이다. 한편, 우리는 그렇게 부지런하지 않다. 단순히 얼마 전에 만난 친구 한 명의 의견을 따를 수도 있다. 유행에 반대로 행동하는 경우도 있지만, 여전히 주변의 의견을 참고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갤럭시냐 아이폰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세상에는 나 같은 팔랑귀도 있지만, 자기 취향을 고수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주변인들의 의견을 고려하기는 하지만, 쉽사리 의견을 바꾸지는 않는다. 주변인들의 의견을 참고하는 방식이 극단적인 세상을 상상해 보자. 한쪽 극단에는 주변사람들의 의견을 무조건 따르는 식으로 의사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극단적인 팔랑귀들의 세상이다. 다른 쪽 극단에는 주변사람들의 의견에 절대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극단적인 고집쟁이들의 세상이다.
세상 사람들이 공평하게 절반은 삼성에서 만든 스마트폰을, 절반은 애플에서 만든 스마트폰을 쓰고 있었다고 해보자. 극단적인 고집쟁이의 세상에서는, 어느 스마트폰도 우세를 점하지 못하고 공평하게 절반씩 소비시장을 점유하고 있을 것이다. 모두들 고집스럽게 원래 가지고 있던 스마트폰 기종을 유지할 테니 말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삼성이나 애플은 더 이상 좋은 핸드폰을 개발하려고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원래 삼성을 쓰던 사람은 계속해서 삼성을 사용하고 아이폰을 쓰던 사람은 아이폰을 사용하니, 두 회사가 굳이 돈을 들여서 제품을 개발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주변 의견에 조금이라도 귀를 기울인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사람들이 더 좋은 스마트폰을 찾아 떠날 수도 있으니, 두 회사는 계속해서 더 좋은 제품을 만들고 사람들에게 어필한다. 2011년, 나의 첫 스마트폰은 갤럭시 S1이었다. 그렇지만 주변에 친구들을 보면, 왠지 모르게 아이폰에 눈 길이 갔다. 하지만 아이폰은 처음 사용하기 진입장벽이 있고, 당시에는 AS도 잘 안 되는 등 여러 불편함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6년, 결국 나는 아이폰으로 갈아탔다. 아이폰이 멋져 보인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 이후로 아이패드, 맥북, 애플워치 등을 구입했고, 애플은 내 일상에 깊숙이 자리 잡았다. 애플은 자사 상품 사이에 연결성을 높여 애플 생태계에 한 번 발을 들이면 다시 밖으로 나가기 어렵게 만들었다. 이런 전략으로 애플은 나와 같은 충성고객층을 두껍게 유지했다.
그런데 여기에도 이변이 생겼다. 2019년, 삼성이 폴더블 스마트폰을 출시한 것이다. 아무리 애플에 충성도가 높은 고객이더라도 접었다 폈는 폴더블 폰에는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두 가지 애플리케이션을 동시에 띄워도 불편하지 않게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화면과, 접으면 아기자기한 사이즈가 되어 예쁘게 꾸밀 수 있기까지 한 폴더블 스마트폰은 분명 애플에는 없는 상품이었다. 더군다나 2000년대의 감성을 간직한 92년생에게 폴더폰은 그 시절 Y2K 감성을 불러일으키기까지 했다. 애플에서도 폴더블 스마트폰을 출시할 예정이라는 소문이 들려오기는 하지만 2026년이나 되어야 가능하다는 전망이다. 이러니 애플 생태계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던 사람이라도 옆에서 스마트폰을 접었다 폈다 한다면, 한 번 즈음은 혹하지 않겠는가?
팔랑귀? 오히려 좋아!
자기 쌍극자들이 옆에 있는 자기 쌍극자의 방향을 무시한 채로 제각기 다른 방향을 가리키면 자석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에서도 서로가 서로의 의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니,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차원을 넘어 오히려 갈등이 심화되기도 한다.
요즘 우리나라는 갈수록 여러 방면에서 갈등이 심해지고 있다. 정치, 종교, 젠더 갈등에 이제는 세대 갈등까지 더해졌다. 갈등이 심한 주제들은 자칫 이야기를 잘못 꺼냈다가는 분위기가 안 좋아지거나 심할 경우 상대와 사이가 틀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대화 주제로 꺼내기 조심스럽다. 갈등이 심할수록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그렇기에 오해가 깊어지고 갈등이 깊어지는 악순환이 일어난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주변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면, 무언가 재미난 일이 일어난다. 기업들은 새로운 고객을 확보하기 위해 차별화되는 더 좋은 제품을 개발하고, 중국집에서는 짬뽕과 짜장면을 넘어 짬짜면이나 짜장돈가스 같은 독특한 메뉴들이 등장한다. 게다가 갈등이 깊을수록 필요한 건 서로의 입장을 들어보는 일이다. 그러다 보면 꼭 같은 입장을 취하지는 않을 수는 있어도 최소한 서로의 의견을 존중할 수는 있게 된다.
이런 상황들을 종합해 보니, 나의 팔랑귀가 조금은 다르게 보이기도 한다. 사실 주변 사람들의 의견에 영향을 많이 받는 나 자신이 줏대가 없어 보여 탐탁지 않기도 했다. 그렇지만 주변 사람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인 덕분에 나는 다채로운 경험을 할 수 있었다. 회사 앞 중국집에서 내가 먹어보지 않은 새로운 메뉴에 도전해 볼 수 있었고, 시원한 커피를 즐기는 방법에 눈을 뜰 수 있었다. 또 삼성의 세계와 애플의 세계를 모두 경험해 볼 수 있었다.
그러니 팔랑귀로 살아가는 일은 어찌 보면 오히려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 다른 이의 의견에 귀 기울일 수 있고 인생을 풍성하게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 한 단계 더 나아가서는 우리 사회가 보다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기여할 수 있는 열린 사고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다. 팔랑귀라는 이유로 기죽을 필요는 없어 보인다.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길만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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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다해(https://linktr.ee/dahae.roh)
92년생으로 Z는 낯선 M세대. 재미를 좇아 살고 있다. 어느덧 서른을 넘었지만, 아직도 정해진 길 없이 세상을 탐험하고 있다. 하고 싶은 것, 재미있어 보이는 것은 다 하고 살자는 주의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데, 책을 써서 이름을 남기려고 한다. <90년생이 온다>라는 기념비적인 책이 나온지 6여년이 지난다. 이 사회에 새로운 충격을 주었던 90년생이 전해주는 90년생 이야기가 더 많이 세상에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