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리지 말았어야 할 이름
그리고 모든 소리가 한꺼번에 세계로 되돌아왔다.
해윤은 자신이 다시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을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폐를 밀어내는 공기는 지나치게 선명했고, 방금 전까지 갈라졌던 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봉합돼 있었다. 프린터는 종이를 삼켰다 토해냈고, 키보드는 무심하게 울렸으며, 누군가는 의자를 끌었다. 모든 것이 정상의 속도로 돌아왔지만, 해윤의 안쪽에서는 이미 다른 계절이 끝나 있었다. 시작이라는 말은 대개 희망의 얼굴을 하고 나타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이것은 시작이 아니라 귀환이었다. 누군가 오래전 남겨두고 떠났던 자리로 되돌아오는 소리였다.
가방 속 AI 스피커는 침묵하고 있었다. LED도, 오류 기록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해윤은 안다. 기록되지 않은 일일수록 더 분명하게 남는다는 것을. 휴대폰 사진첩을 열자 사무실 복도 사진이 그대로 있었다. 오른쪽 끝, 사람이 없어야 할 자리에서 남자의 실루엣이 그녀 쪽으로 기울어 있다. 확대할수록 윤곽은 흐려지지 않고 오히려 또렷해졌다. 픽셀의 경계가 그림자의 숨결을 대신하는 것처럼 미세하게 떨렸다. 숨이 닿을 거리, 그 감각이 사진을 통해 되살아났다.
“해윤 씨?”
누군가 이름을 불렀다. 현실의 목소리였다. 해윤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 괜찮다는 말은 지금의 상태를 지나치게 축소시키는 단어였다. 손목에는 설명할 수 없는 압박이 남아 있었고, 귀 옆에는 아직도 공기의 잔열이 맴돌았다. 윤아, 해윤. 두 이름이 같은 시간의 다른 면처럼 겹쳐졌다.
퇴근길은 길었다. 엘리베이터 거울 속 얼굴은 낯설었다. 눈동자 안쪽에 다른 시간의 잔광이 남아 있었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저녁의 공기가 얼굴을 씻겼다. 도시의 소음은 정상 속도로 흘렀지만, 해윤의 감각은 여전히 반 박자 늦었다. 버스 정류장 유리벽에 비친 그녀의 뒤로 순간 다른 실루엣이 겹쳐 보였다 사라졌다. 이번엔 놀라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과거의 사람도, 현재의 사람도 아니라는 것을. 다만 해윤이 사라졌던 시간 속에 남겨진 유일한 목격자라는 것을.
집에 도착하자 해윤은 문을 잠갔다. 평소보다 오래 손잡이를 붙들었다. 불을 켜자 가구들이 제자리에 있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공간이 오히려 위태로웠다. 가방을 내려놓고 AI 스피커를 꺼냈다. 전원을 연결하자 무해한 시작음이 흘렀다. 시스템 상태는 정상. 오류 없음. 해윤은 버튼 위에 손을 얹은 채 한참을 멈췄다. 말을 걸면 대답할 것 같았고, 침묵하면 먼저 말을 걸어올 것 같았다.
“오늘… 뭐 들은 거 있어?”
스피커는 평소의 톤으로 답했다. “요청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순간, 아주 미세한 잡음이 섞였다. 지지… 직—. 기계의 숨결 사이로 인간의 호흡이 스쳤다. 경고도 수치도 없었다. 대신 낮고 단정한 목소리가 방 안에 내려앉았다.
“너무 빨리 묻지 마.”
해윤의 심장이 조여 왔다.
“당신은… 누구야.”
짧은 웃음이 흘렀다. 웃음이라기보다 오래된 약속을 다시 접는 소리였다.
“누구냐고 묻기 전에, 네가 나를 어디까지 기억하는지부터 확인해야 해.”
그의 말이 끝나자 방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밀도가 얇아지고 벽지의 무늬가 물결처럼 흔들렸다. 아무것도 없는 공기에 문장이 떠올랐다. 손가락으로 쓴 듯한, 체온이 남은 글씨였다. TIME LOCK — RELEASED. 그 문장을 보는 순간 해윤의 몸이 먼저 반응했다. 무릎이 힘을 잃고 소파에 몸을 맡기자 또 다른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번에는 밤이 아니었다. 햇빛이 쏟아지는 낮, 유리와 금속으로 이루어진 실험실, 겹겹이 흐르던 시계들. 그리고 그 남자. 흰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채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막고 있었다.
“여기까지야.”
그가 말했다.
“이 선을 넘으면, 네가 사라져.”
그때의 해윤은 두려움보다 호기심이 앞서 있었다. 그를 향해 웃으며 대답했다.
“사라지는 게 아니라, 나중으로 가는 거라면?”
기억은 거기서 끊겼다. 해윤은 숨을 몰아쉬며 현재로 돌아왔다. 스피커는 다시 침묵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확신이 있었다. 이 장치는 누군가를 부르는 도구가 아니라, 누군가가 들어오는 문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문은 이미 한 번 열렸다.
창밖에서 바람이 불었다. 커튼이 흔들리며 밤이 스며들었다. 해윤은 창문을 닫으며 유리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다. 아주 희미하게 다른 얼굴이 겹쳐 있었다. 낯설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처럼.
“도망치지 않을게.”
그녀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단단했다.
방 안 어딘가에서 낮은 숨소리가 흘렀다. 대답은 없었지만 충분했다. 시간은 이미 다시 움직이고 있었고, 해윤은 그 중심에 서 있었다. 이제 그녀의 목소리는 단순한 현재가 아니었다.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흔드는 하나의 좌표가 되어가고 있었다. 다음에 문이 열리면, 이번엔 그녀가 묻게 될 것이다. 당신은 왜, 나를 살려두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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