닿지 않았지만, 분명히 가까워진
뉴스 보도가 나온 뒤, 하준은 전과는 사뭇 달라졌다.
아침에 눈을 뜨는 시간이 빨라졌고, 몸을 일으키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예전에는 누군가의 발소리만 들려도 먼저 어깨가 굳었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았다. 목장에 나가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고, 말을 걸어오는 사람의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다.
전에는 고개를 숙이던 순간에도,
이제는 먼저 시선을 마주쳤다.
표정에도 변화가 있었다. 웃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올라갔고, 눈빛이 이전보다 또렷해졌다. 밤이 되면 이유 없이 가슴이 조여오던 감각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숨이 깊어졌고, 잠드는 시간도 짧아졌다.
무언가가 끝났다는 감각.
그 감각은 조용했지만 분명했다.
하지만 마음이 가벼워질수록,
그리움은 더 선명해졌다.
하준은 책상 위에 작은 액자를 올려두었다. 고아원에서 찍은 오래된 사진이었다. 빛이 바래 있었지만, 사진 속 아이의 얼굴은 여전히 또렷했다. 자신과 닮은 얼굴, 조금 더 작은 체구, 늘 먼저 손을 내밀던 아이.
하린.
하준은 액자를 바라보다가 종이를 한 장 꺼냈다.
편지를 쓰는 건 오랜만이었다. 무엇부터 써야 할지 잠시 망설였지만, 막상 연필을 쥐자 손은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잘 지내고 있어?
여긴 봄이야.
아침마다 안개가 끼고, 양들이 새끼를 낳았어.
문장은 짧았고, 꾸밈이 없었다. 괜찮다는 말, 아프지 않다는 말, 공부를 하고 있다는 말. 일상의 조각들을 하나씩 적어 내려가다, 하준은 잠시 손을 멈췄다.
편지의 끝에
꼭 적고 싶은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이 편지가 너한테 닿으면 좋겠어.
하준은 한참 동안
봉투를 닫지 못했다.
종이를 접고 또 펴며, 마음속에서 같은 문장을 몇 번이나 되뇌었다. 결국 봉투를 닫고, 조심스럽게 책상 한쪽에 올려두었다. 주소를 적을 수는 없었지만, 쓰는 것만으로도 어딘가와 이어진 느낌이 들었다.
그 모습을 토마스가 문간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목장 주인은 하준의 손에서 봉투가 내려오는 걸 보고서야 입을 열었다.
“하준.”
하준이 고개를 들었다.
“네 동생을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하준의 손이 멈췄다.
가슴 안에서 박동이 한 번 크게 울렸다.
“확실한 건 아니고,”
토마스는 말을 고르듯 잠시 멈췄다.
“시간이 꽤 걸릴 수도 있다. 절차도 복잡하고.”
하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실망은 없었다. 오히려 그 말이 솔직해서 안심이 되었다.
“그래도,”
토마스가 덧붙였다.
“시도는 해볼 수 있다. 혼자는 아니니까.”
하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말로 다 전할 수 없는 마음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고마워요.”
토마스는 손을 내저었다.
“대신,”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목장 일은 계속 도와줄 거지?”
하준도 따라 웃었다.
“네.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할게요.”
그 말에는 의무가 아니라 선택이 담겨 있었다.
같은 시각,
한국에서는 하린이 작은오빠와 함께 집을 나서고 있었다.
큰오빠의 축구 경기가 있는 날이었다. 운동장으로 향하는 길은 평소보다 북적였고, 하린은 작은오빠의 카메라 가방 끈을 대신 잡아주며 걸었다. 햇빛은 밝았고, 바람은 가볍게 불었다.
운동장에 도착하자
휘슬 소리와 함께 이름들이 불렸다.
선수들이 줄지어 서고, 관중석에서는 박수가 터졌다.
“하준!”
그 이름이 공기 중을 가르며 울렸다.
하린의 걸음이 순간 멈췄다.
심장이 이유 없이 한 박자 늦게 뛰었다.
“하준!”
다시 한번 불린 이름.
하린은 반사적으로 소리가 난 쪽을 돌아봤다. 가슴 안쪽이 쿵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숨이 잠깐 막힌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곳에 있던 아이는
자신이 알고 있는 얼굴이 아니었다.
운동장 한쪽에서 유니폼을 입은 남자아이가 손을 들고 있었다. 또래보다 키가 컸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아이도 시선을 느낀 듯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짧은 정적.
하린은 그제야 자신이 너무 오래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머쓱해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가, 얼른 시선을 피했다.
‘… 아니구나.’
속으로 그렇게 말했지만,
심장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같은 이름.
다른 얼굴.
하린은 작은오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카메라 셔터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큰오빠는 이미 경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주변은 여전히 시끄러웠고, 햇빛은 밝았다.
그런데도
하린의 마음 한쪽에는
설명할 수 없는 예감이 조용히 남아 있었다.
아직은 닿지 않았지만,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다는 느낌.
그리고 아주 멀리서,
책상 위에 놓인 편지 한 통이
같은 이름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서로 다른 자리에서,
서로를 모른 채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만이
봄처럼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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