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일도 아니라고 말해버린 순간들
그날도 나는 아무 일 아닌 척을 했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렇게 넘긴 날들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는 걸. 큰 사고가 있었던 것도, 삶이 한순간에 무너진 것도 아니었다. 다만 아무 일 아닌 척 고개를 끄덕였던 순간들이 차곡차곡 쌓였고, 그게 어느새 내 하루의 기본값이 되어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나는 그 사실을 떠올렸다. 오늘도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오늘은 또 무엇을 아무 일 아닌 척해야 할까.
휴대폰 화면에는 여전히 읽지 않은 알림이 쌓여 있었다. 어제의 것과 그제의 것,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기억나지 않는 메시지들까지. 나는 알림을 하나의 풍경처럼 바라보았다. 보이지만 들어가지 않는 방, 열면 정리해야 할 말들이 쏟아질 것 같은 공간. “괜찮아?”라는 질문이 가장 위에 떠 있었다. 나는 그 말을 가장 늦게 읽었다. 괜찮냐는 질문은 대답을 요구하는 말이 아니라, 상태를 규정하는 말처럼 느껴졌다. 괜찮다고 말하면 괜찮아야 하고, 괜찮지 않다고 말하면 설명해야 하니까. 그래서 나는 대답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아무 일 아닌 척 넘기는 게, 그나마 덜 아픈 선택처럼 느껴졌다.
부엌에서 컵을 꺼내며 나는 어제의 컵을 떠올렸다. 가장자리에 난 미세한 금. 오늘은 그 컵을 쓰지 않았다. 뒤쪽으로 밀어 두고, 멀쩡해 보이는 컵을 골랐다. 같은 모양인데도 어떤 컵은 아직 깨지지 않았고, 어떤 컵은 이미 금이 가 있었다. 사람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어떤 사람은 이미 어딘가가 조금씩 깨지고 있는 상태. 그리고 그 금은 대부분 조용히 생긴다. 소리도 없이, 이유도 없이. 나는 물을 마시며 거울을 봤다.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괜찮아 보이네.” 그 말은 칭찬 같지만, 나에게는 명령처럼 들렸다. 너는 괜찮아야 해. 네 얼굴이 그렇잖아.
밖으로 나설 준비를 하며 나는 평소 입던 옷을 골랐다. 눈에 띄지 않는 색, 특별히 설명할 필요 없는 차림. 이렇게 입고 있으면 질문을 덜 받는다. 어디에 속해 있느냐는 질문,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질문,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거냐는 질문. 사람들은 내가 쉬고 있다고 말한다. 쉬고 있다는 말은 편리하다. 하지만 그 말속에는 많은 것이 생략되어 있다. 아무 데도 속하지 않은 시간, 결정되지 않은 상태,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불안. 나는 그 모든 걸 ‘쉼’이라는 단어 하나로 덮어두고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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