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달이 잠든 곳에서

비는 기억을 깨운다.

by Helia

서울, 비 내리는 새벽.

가로등 불빛이 번들거리는 젖은 아스팔트 위로 묵묵히 비가 내린다. 빗방울은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떨어져, 골목마다 오래된 기억의 먼지를 털어낸다. 나는 우편함 앞에 서서 차갑게 식은 손에 든 작은 엽서를 바라본다. 그 글씨에는 익숙함과 낯섦이 공존한다. 줄 맞춰 흐르는 문장 하나하나에 그가 남긴 숨결이 배어 있다.

> “잘 지내고 있지?
나는 아직도 네 눈을 기억해.”


12년 전, 그는 단 한마디 말도 없이 사라졌다. 그날 이후로 모든 풍경은 색을 잃었고, 나는 시간 속에 고요히 멈춰 있었다. 잊으려 발버둥 칠수록 기억은 더욱 선명해졌고, 침묵은 무거운 층을 이루어 내 안을 메웠다.

하지만 이 엽서는 침묵을 깨운다. 마치 잊힌 꿈이 낮잠에서 깨어나듯, 나는 다시 그 밤의 골목으로 걸어 들어간다. 잊힌 동네의 반지하 집, 낡은 책등이 빛을 잃어가는 헌책방, 우산 없이 흠뻑 젖은 채 끝없이 이어졌던 그 골목길. 모든 순간이 눈앞에 펼쳐진다.

나는 엽서를 손끝에 쥔 채, 오래된 습관처럼 카메라 가방을 메고 골목으로 나선다. 비에 젖은 필름에는 아직도 그의 미소가 아스라이 남아 있을 거라 믿으며. 그러나 카메라 셔터를 눌러도, 빈 화면만 남는다. 그는 이미 이미지가 아닌 추억이 되었다.

“기억은 늘 가장 어두운 골목에 있다.”

나는 그 문장을 되뇌며,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는다. 이 길이 내게 어떤 상처를 남겼든, 나는 그 길을 걸어야만 한다. 사라진 사람과 마주하기 위해, 남겨진 내가 나를 찾아가기 위해.

비는 좀처럼 그치지 않는다. 골목마다 스며드는 빛과 그림자가 뒤엉켜, 현실과 기억 사이의 경계를 흐린다.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멀리서 들려오는 우산 끄는 소리에 귀 기울인다. 그의 숨결인지, 내 안에 남은 잔향인지 분간할 수 없다.

한때 우리는 같은 하늘 아래를 걸었다. 같은 별을 바라보며, 같은 미래를 꿈꿨다. 그러나 사랑은 말로 다 전해지지 않았다. 사랑은 엇갈렸고, 우리는 서로에게 묻지도, 묻지 못한 채 흩어졌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다시 그 밤으로 돌아간다.
달이 잠든 거리, 사라진 자와 남겨진 자가 교차하는 시간.
내가 그를 기억하는 한, 그는 온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작은 엽서 한 장이 엇갈린 운명을 이어 붙이는 실타래가 되어, 나는 다시 걷기 시작한다.

사라짐의 골목 끝에서, 잊히지 않는 누군가를 찾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