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오래된 벽에 기대어

그를 잊은 줄 알았다. 그 벽 앞에 서기 전까진.

by Helia

정다온은 오늘 아침,
엽서 한 장을 받았다.

아무런 우표도, 발신인도 없는 낡은 엽서.
그런데 그 글씨를 보는 순간, 손끝이 떨렸다.
짧고 기울어진 문장,
마지막 글자의 획이 남긴 익숙한 망설임.

> “잘 지내고 있지?
나는 아직도 그날의 네 눈을 기억해.”



그는 열두 해 전,
말도 없이 사라졌던 사람이다.
떠난다는 말 한마디 없이 사라졌고,
사라진 뒤로 아무 소식도 없었다.

그를 원망한 시간보다
그가 없는 삶에 익숙해진 시간이 더 길었는데,
왜 이제 와서 이 문장이 도착한 걸까.

다온은 문득 몸이 움직이는 대로 걸었다.
버스를 타고, 시장 골목을 지나,
계단을 올라 반지하 그 집 앞에 섰다.

그 벽은 그대로였다.
금 간 벽돌과 묵은 담쟁이 줄기,
그가 기대어 담배를 피우던 자국까지.
모든 것이 시간을 멈춘 듯 서 있었다.

그 집에는 이제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고,
창문엔 작은 화분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안에 여전히
그의 그림자가 있을 것만 같았다.

그날도 이렇게 비가 오고 있었고,
그는 말없이 벽에 등을 기대앉아 있었다.
다온은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 말을 안 해?”
“말하면, 끝날까 봐.”

그건 이별의 예고였는지도 몰랐다.
그가 그 말 이후 떠날 줄 알았다면,
그녀는 무언가 더 말했을까.
그를 안았을까.
붙잡았을까.

다온은 벽에 천천히 등을 기대었다.
서늘한 벽면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왔고,
마음은 더 깊이 젖어들었다.

엽서를 손에 쥔 채,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의 온기, 그 밤의 숨결,
말없이 흘러간 시간들이
눈앞에서 장면처럼 되살아났다.

그는 떠난 게 아니라,
그냥 더 이상 머무를 방법을 몰랐던 거였을까.

그는 늘 조용했고,
사라지는 일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사랑도, 이별도, 미안하다는 말조차
끝내 제대로 꺼내지 못하던 사람.

그 벽은 이제 낯선 집의 일부였지만,
다온에게는 여전히
그와 함께였던 시간의 입구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손끝으로 벽을 따라 천천히 문질렀다.
모서리에 다 닳은 벽돌 하나,
그가 그날 담배를 비벼 끄던 자국,
그날 이후 한 번도 와보지 못했던 곳.

기억은 시간이 흐르면 흐릿해지는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그날의 냄새와 소리는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그가 남긴 것은 말이 아니라,
이 모든 자리에 스며든 흔적이었는지도 몰랐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말하듯 중얼였다.

“나, 너 잊은 줄 알았어.
그 벽 앞에 다시 서기 전까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