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것들 사이, 남은 온기
무너진 벽 너머, 책장 아래에서 겨우 꺼낸 노트를 다온은 조심스럽게 펼쳤다. 오래된 잉크 냄새, 구겨진 종이, 그리고 습기에 절어 읽기 힘든 몇 줄의 문장. 그 속에는 이현의 것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글씨가 있었다.
“이 서점은 여전히 너의 것이더라.”
익숙한 듯 낯선 문체. 펜 끝을 누르듯 꾹꾹 눌러쓴 글자들이 선우를 떠올리게 했다. 아니나 다를까, 서점 유리문이 살짝 열리는 소리와 함께 그가 조용히 들어섰다.
“혹시나 해서. 네가 있을 것 같았어.”
다온은 대꾸하지 않았다. 선우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무너진 서점 안은 먼지와 비의 흔적들로 가득했지만, 그 틈에서
두 사람만이 또렷했다.
“여기, 이현이랑 자주 왔던 곳이지?”
“…응.”
“근데 이상하지. 지금은 네가 혼자 앉아있고,
그 사람은 어디에도 없네.”
다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노트를 덮으며 고개를 떨궜다. 선우는 그런 그녀를 지켜보다,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사실 나도 자주 왔었어. 너희 둘의 뒷모습을 멀리서 본 적도 있어. 괜찮은 척했는데,
안 괜찮더라.”
“그땐, 나도… 그 사람만 보였어.”
다온의 고백에 선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무너진 책장 옆, 가장자리 의자에 앉았다. 오래전에 함께 앉아 읽었던 시집이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
“요즘은 어때?” 대신 선우는 다른 말로 물었다.
“그냥 살아. 밥 먹고, 자고, 일하고… 그게 다야.”
“그렇게라도 잘 지냈다니, 다행이다.”
잠시의 침묵. 그 뒤에 선우가 입을 열었다.
“다 온아. 그냥, 네가 언제라도 필요하면
나한테 와.”
그 말은 조심스러웠지만 단단했다. 고백이라기보단 다짐에 가까웠고,
다온은 그 말에 울컥했다.
“선우야.”
“응.”
“… 고마워. 그냥 그 말이, 지금은 좀 울컥하네.”
서점 안엔 여전히 먼지가 떠다녔고, 창밖은 어둑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다온의 어깨는 이전보다 조금 가벼워졌다. 무너진 서점 속에서도, 아직 살아 있는 온기가 남아 있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날 밤, 다온은 오랜만에 이현의 꿈을
꾸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