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 다정함은 언제나 늦게 도착한다.

늦게 오는 다정함은, 오래도록 머문다”

by Helia

작은 갤러리, 하얀 벽, 그 위에 덜 마른 물감 자국처럼 선우가 서 있었다.

다온은 그가 먼저 그녀를 알아볼 줄은 몰랐다.

“다 온아, 오랜만이다.”

익숙한 음색, 조금 더 낮아진 목소리.

그는 그대로였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예전보다 더 단정해진 옷차림,

180이 넘는 키에 자연스럽게 걸쳐진 크림색 셔츠,

모델 같은 분위기, 하지만 여전히 말투는 느렸다.

그와 눈을 마주친 순간, 다온은 긴장을 숨기려 고개를 살짝 돌렸다.

작품 설명 문구를 읽는 척했지만,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현이랑은 요즘 어때?”

그의 표정엔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맑음이 담겨 있었다.

다온은 한 박자 늦게 눈을 마주쳤다.

“… 헤어졌어. 우리.”

목소리는 낮았고, 말끝은 무너졌다.

선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다온에게는 더 다정하게 느껴졌다.

잠깐의 정적.

두 사람 사이로 사람들이 지나갔고,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멀리 들려왔다.

전시장의 조명이 유난히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넌 아직 글 써?”

그가 물었다.

“응. 꾸역꾸역.”

다온은 미소를 지었지만, 눈동자엔 여운이 남아 있었다.

선우는 웃었다.

“역시 너다.”

그 짧은 말이, 다온의 마음 어딘가를 건드렸다.

누군가가 자신을 ‘그대로’ 기억해 주는 일은

참 오래도록 다정한 감정으로 남는다.

“예전엔…” 선우가 말을 이었다.

“내가 다온이 좋아했던 거, 이현도 알았을까?”

다온은 흠칫 놀랐지만, 웃어버렸다.

“몰랐을걸. 나도 몰랐는걸.”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눈빛이 따뜻했다.

누군가의 마음이 오래 묵어도 썩지 않고

그저 조용히 그 자리에 머물렀던 느낌.

잠시 후, 그는 갤러리 바깥을 가리켰다.

“밖에 햇살 좋아. 잠깐 걷고 갈래?”

다온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걷는 길, 말이 없어도 편안한 공기가 흐르는 거리.

그늘진 벽에 비친 서로의 그림자가 조용히 겹쳐졌다.

그 빛 속에서 선우는 다시 입을 열었다.

“다 온아. 다음엔… 나한테 와.”

그 말은 고백도 아니고, 부탁도 아니었다.

그저, 기다려도 좋다는 작은 초대처럼 느껴졌다.

다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마음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다정함은 언제나 그렇게

한참 늦은 시간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온은 그 늦음을, 이번엔 피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