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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혀끝에 남은 매운맛처럼

by Helia

분식집 문을 나서는 순간,
입안에 남아 있던 매운 기운이 차가운 공기와 부딪혀 천천히 가라앉았다.
혀끝은 아직 얼얼했지만, 그 감각이 싫지는 않았다.
마치 오늘 하루가 진짜였다는 증거처럼 몸 어딘가에 남아 있는 느낌이었다.

가연은 계산대 앞에서 잔돈을 받아 들고 동전을 한 번 굴렸다.
딸깍거리는 소리가 작은 가게 안에 또렷하게 울렸다.
그 소리 하나로 이곳에서의 시간이 끝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밖으로 나오자 해는 이미 많이 기울어 있었다.
골목은 여전히 좁았고, 벽에 붙은 캐릭터 그림자들이 바닥에 길게 늘어져 있었다.
낮과 밤의 경계에 걸린 시간, 어느 쪽으로도 완전히 넘어가지 않은 저녁이었다.

가연은 말없이 내 팔에 팔짱을 꼈다.
힘이 들어가지 않은 손길이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걷기로 정해져 있었던 것처럼, 걸음은 자연스럽게 맞았다.

정류장까지 가는 동안 가연은 쉬지 않고 떠들었다.
체육 시간에 있었던 일, 급식에서 바뀐 반찬 이야기, 새로 본 만화 얘기까지.
중요한 이야기는 없었지만, 그게 오히려 좋았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말들이었다.
가연의 말은 내 하루에 빈틈을 만들지 않았다.

버스가 도착하자 가연은 멈춰 섰다.
이번에는 같이 타지 않았다.

“잘 가.”
“내일 보자.”

붙잡지도, 앞서 나가지도 않는 인사였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응.”

버스에 올라타 창가에 앉았다.
가연은 정류장에 남아 손을 흔들지도 않고 서 있었다.
버스가 출발하고 나서야 시선이 자연스럽게 떨어졌다.

집 앞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다.
현관 앞에 서서 괜히 한 번 숨을 들이켰다.
집에 들어가는 일이 어제보다 덜 어려웠다.

이모는 아직 오지 않았다.
집 안은 조용했고, 공기는 차분했다.
가방을 내려놓고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오늘 하루를 몸에서 떼어내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부엌에서 물을 한 컵 마시고 방으로 들어갔다.
책상 앞에 앉아 숙제를 꺼냈다.
오늘은 미루고 싶지 않았다.
오늘 해야 할 일은 오늘 안에 끝내고 싶었다.

가연이 건네준 필기 노트를 옆에 펼쳤다.
글씨는 반듯했고, 중요한 부분마다 작은 표시가 남아 있었다.
어디서 선생님이 잠깐 멈췄는지,
어디를 놓치기 쉬운지,
이미 한 번 지나온 사람이 남겨둔 흔적 같았다.

덕분에 진도를 따라잡는 일은 생각보다 수월했다.
막히는 부분이 있어도 노트를 한 번 더 넘기면 길이 보였다.
답을 베끼는 느낌이 아니라, 같이 걷는 느낌이었다.

연필을 움직이다가 문득 가연의 얼굴이 떠올랐다.
떡볶이를 내 쪽으로 밀어주던 손,
가게 안에서 웃던 표정,
정류장에서 했던 짧은 인사.

괜히 노트 모서리를 한 번 더 반듯하게 맞춰 놓았다.

걱정했던 장면들이 하나씩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자신을 두고 수군거릴 거라는 생각,
대놓고 쳐다보고 피할 거라는 상상.
그런 일들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하루를 망칠 만큼은 아니었다.

연필을 내려놓고 노트를 덮었다.
오늘 하루가 조용히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그때 현관에서 소리가 났다.
이모가 들어왔다.
가방을 내려놓고 신발을 벗는 동작이 느렸다.
하루를 다 쓰고 돌아온 사람의 몸이었다.

이모는 잠깐 나를 보더니 먼저 물었다.

어땠어.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생각보다 나쁘진 않았어.

이모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래.

부엌 쪽으로 가며 다시 물었다.

배고프지.
뭐 좀 줄까.

아니.
나 친구랑 먹고 와서 배불러.

이모의 손이 잠깐 멈췄다.

그래.
뭐 먹었는데.

김떡순.

이모는 짧게 웃었다.

맛있는 거 먹었네.

잠깐 뜸이 흐른 뒤, 이모가 물었다.

친구는 누군데.

가연.
나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애야.

이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걔네 엄마가 너 옛날 학습지 선생님이셨지.

응.

그 정도면 오늘에 대해 말할 건 다 말한 것 같았다.
이모도 더 묻지 않았다.

그날 밤, 소녀는 비교적 빨리 잠들었다.
혀끝에 남아 있던 매운 기운이 아직도 조금 느껴졌고,
그 감각이 오늘이 꿈이 아니라는 걸 조용히 알려주고 있었다.

몸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내일도, 다시 나갈 수 있을 거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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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되지 못한 마음을 글로 쌓습니다. 기억과 계절, 감정의 결을 따라 걷는 이야기꾼. 햇살 아래 조용히 피어난 문장을 사랑합니다." 주말은 쉬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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