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서지 않았다.
소녀는 학교로 갔다.
사건이 터지고, 석 달 만이었다.
그 사이 계절은 한 번 바뀌어 있었다.
햇빛의 각도가 낮아졌고, 바람은 이전보다 마른 냄새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소녀의 몸은 그 시간을 전부 건너온 것 같지 않았다.
앞으로는 걷고 있는데, 안쪽 어딘가는 아직 멈춰 있는 느낌.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을, 몸이 먼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눈은 알람보다 먼저 떠졌다.
방 안은 아직 어두웠고, 천장은 흐릿했다.
눈을 뜨는 순간, 어제의 말이 그대로 공기 중에 남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 학교 갈래.
그 문장이 아직 바닥에 떨어지지 않고 떠 있었다.
부엌 쪽에서 소리가 났다.
그릇이 맞닿는 소리, 국을 데우는 소리.
이모가 아침상을 차리고 있었다.
소녀는 잠시 이불을 붙잡은 채 누워 있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식탁 위에는 늘 먹던 밥과 국, 김이 놓여 있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아침상이었는데,
그날은 숟가락을 드는 손이 조금 늦었다.
소녀는 밥을 한 숟갈 입에 넣고 천천히 씹었다.
맛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턱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이모는 맞은편에 앉아 소녀를 힐끗 보았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괜찮냐고 묻지 않는 얼굴이었다.
괜찮지 않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의 얼굴.
그 침묵이 오히려 숨을 쉬게 했다.
소녀는 밥을 남기지 않았다.
국까지 천천히 비웠다.
그래야 오늘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숟가락을 내려놓는 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 들렸다.
방으로 돌아가 전날 밤 꺼내두었던 옷을 입었다.
평소 학교 갈 때 입던 옷.
특별할 것도, 새로울 것도 없는 옷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마음이 덜 흔들렸다.
거울을 한 번 보았다.
얼굴은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눈이 조금 달라 보였다.
괜히 입꼬리를 만져보고, 머리를 한 번 더 빗었다.
괜찮아 보이고 싶은 마음이 자꾸 손끝으로 올라왔다.
가방을 메고 이모와 나란히 집을 나섰다.
빌라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발소리가 크게 울렸다.
난간은 차가웠고, 아침 공기는 생각보다 서늘했다.
빌라 입구에 다다르자 소녀는 걸음을 멈췄다.
가방끈을 다시 잡고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
그리고 이모를 올려다봤다.
“이모… 나 다녀올게.”
말은 그렇게 나왔지만, 표정에는 긴장이 그대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눈이 먼저 굳어 있었고, 발은 아직 방향을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모는 소녀의 얼굴을 한참 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괜찮겠어?”
“혼자 가도 돼?”
소녀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숨을 한 번 고르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늦게.
“응. 괜찮아.”
이모는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말했다.
“이모가 같이 가줄까?”
그 말에 소녀의 가슴 안쪽이 잠깐 흔들렸다.
같이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목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혼자 갈게.”
말이 생각보다 또렷하게 나왔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이모는 한숨처럼 웃으며 소녀의 가방을 한 번 고쳐 메어주었다.
어깨에 닿는 손길이 짧았지만 분명했다.
“그래.”
“끝나고 바로 와.”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발이 앞으로 나갔다.
몇 걸음 걷다가 뒤돌아봤다.
이모는 아직 빌라 입구에 서 있었다.
손을 흔들지도, 부르지도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서서 보고만 있었다.
소녀는 다시 앞을 보고 걸었다.
등 뒤에서 이모의 시선이 한동안 따라오고 있다는 걸 느끼면서.
학교로 가는 길은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편의점 앞, 횡단보도, 같은 방향으로 걷는 아이들.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장난을 쳤다.
소녀는 그 사이를 조용히 걸었다.
숨을 조금 얕게 쉬면서.
학교 정문이 보이자 가슴이 한 번 내려앉았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발걸음이 잠깐 느려졌다.
소녀는 문 앞에서 멈춰 섰다.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가, 잠시 떼었다.
안쪽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손잡이는 차가웠다.
바닥에 닿은 발바닥의 감각이 유난히 또렷했다.
소녀는 다시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었다.
교실 안의 공기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분필 냄새, 책장 넘기는 소리, 의자 끄는 소리.
모두 알고 있던 것들이었다.
그래서 더 낯설었다.
몇몇 아이들이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잠깐 머물렀다가 각자 자리로 돌아갔다.
아무 말도 없었다.
그 침묵이 길게 늘어졌다.
담임 선생님은 소녀를 보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왔구나.”
그 한마디에 가슴이 조금 내려앉았다.
선생님은 교실 뒤쪽 자리를 가리켰다.
힘들면 언제든 나와도 된다는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지금은 앉아도 된다는 뜻처럼 느껴졌다.
소녀는 자리에 앉았다.
책상 표면이 차가웠다.
손바닥을 올려두고 한동안 그대로 있었다.
도망치지 않고 여기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조금 믿기지 않았다.
쉬는 시간이 되었다.
아무도 자신을 반기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리에서 바로 일어나지 않았다.
연필을 굴리다 멈추고, 가방 안을 괜히 들여다보다가 다시 닫았다.
종소리만 교실 안을 채웠다.
그때 책상 위로 그림자가 하나 겹쳐졌다.
“현숙아.”
고개를 들자 가연이 서 있었다.
조금 자란 것 같았고, 머리는 예전보다 짧아져 있었다.
하지만 웃는 얼굴은 그대로였다.
“오랜만이네?”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가연은 와락, 소녀를 껴안았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소녀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팔이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허공에 멈춘 채였다.
밀어내지도, 바로 안아주지도 못했다.
가연은 조금 떨어지더니 턱 밑에 손을 가져다 대고
특유의 브이자를 만들며 윙크를 했다.
“이거 기억나?”
그 제스처를 보는 순간, 소녀는 숨을 한 번 내쉬었다.
어깨에 걸려 있던 힘이 조금 풀렸다.
가연은 가방을 뒤적이더니 노트 하나를 꺼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동안 필기한 거야.”
“내 거 쓰면서 네 것도 같이 썼어.”
소녀는 노트를 넘기지 못하고 그대로 바라보았다.
종이가 생각보다 두툼했다.
“나 이거 다 쓰느라 팔 아파 죽을 뻔했다?”
그러더니 웃으며 덧붙였다.
“그러니까 너 오늘 나 맛난 거 사줘야 해.”
“알았지?”
소녀는 노트를 가방 안에 조심히 넣고 작게 말했다.
“… 그래.”
종이 울렸고, 가연은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날, 소녀는 알았다.
빠진 시간을 혼자 메우지 않아도 된다는 걸.
석 달 만에 돌아온 학교에서,
소녀는 다시 자리에 앉아 있었고
내일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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