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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목여행자 박동식 Jan 13. 2020

병원 일기 8

2019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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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일기 7'은 4일 전의 일입니다. 수술 후 불과 3일 만에 제 삶이 너무 피폐해진 사건(?)이었습니다. 3일 내내 이어진 섬망 증세는 정말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그저 헛소리만 하는 상황이라면 다행이겠는데, 112나 친구에게 전화해서 구조 요청을 하는 것을 말려야 했고, 바늘을 뽑거나 수술 부위 거즈를 제거하려는 것도 막아야 했으며, 씻기 위해 집에 가겠다는 것도 잡아야 했던 상황들. 통제를 받을 때 더욱 거칠어지는 행동 때문에 수술 부위까지 걱정해야 했었죠. 병실 불이 꺼지고 취침에 들어가는 10시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이라 더욱 곤혹스러웠습니다. 커튼 너머 다른 환자들에게 미안해 죽을 지경이었으니까요. 24시간 곁에 있어야 했으니 밤이고 낮이고 잠을 제대로 자 본 적도 없었지만 어쩌면 이건 가장 감당하기 쉬운 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새벽입니다. 병실 불은 꺼져 있고 형님도 여느 환자처럼 잠들어 있습니다. 마지막 처치실에 격리되었던 날 이후 4일째의 밤이 지났죠. 저는 평온을 되찾았습니다. 4일 동안 섬망 증세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직도 저녁이면 두려움이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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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형님의 상태는 매우 양호합니다. 믈론 정상인에 비할 수 없죠. 병원 찾아오셨던 분들 대부분은 누워 있거나 앉아 있는 모습만 보았습니다. 형님의 상태를 전혀 파악할 수 없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저 쇠약한 사람 정도로 보였을 겁니다.
하지만 형님은 부축 없이는 거동이 불가능했고 부축을 받아도 걸음 폭은 10cm에 불과했습니다. 한 발씩, 다시 한 발씩. 119에 실려 오기 직전 3일 동안 기어서 다녔다고 했으니 말해 뭐하겠습니까.
뇌에서 몸으로 이어지는 길목의 신경이 제 역할을 못했던 것이죠. 열 가닥의 선을 꼬아서 만든 전선 중 아홉 가닥이 끊어지고 단 한 가닥만 남아도 불은 들어오겠죠. 하지만 나머지 한 가닥이 끊어지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형님도 비슷한 경우라고 보면 되지 않을까 싶네요. 이 상태까지 방치한 것은 오로지 무관심과 무지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가장 미안한 일이었습니다.
이제 수술 후 만 일주일이 넘었습니다. 지난주 화요일 수술을 했으니까요. 현재 수술 이외에 아무것도 한 것이 없지만 형님 상태는 놀라울 정도로 호전되었습니다. 처치실에 격리된 날 강력한 진정제을 맞았기 때문에 거의 이틀을 혼미하게 보냈지만 지금은 혼자서 걸을 수 있고, 혼자서 밥을 먹을 수 있으며 , 혼자서 화장실에도 갈 수 있습니다. 물론 여전히 불안한 걸음이고 젓가락질은 불가능하며, 화장실 이동 시 약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식판을 들고 걸을 수는 없어서 매 끼니 옆에 있어야 합니다. 여전히 제가 자유롭지 못한 이유입니다.
아직 실밥을 뽑지는 않았지만 형님은 오늘부터 재활 치료를 시작합니다. 오전 한 번, 오후 한 번. 퇴원할 때 분명 걸어서 퇴원할 수 있다고 장담했던 것을 지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 수술 직후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어서 걱정을 했었거든요. 긴 재활 기간이 필요하겠다고 판단한 것이죠.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좋아지는 모습을 보면서 안도하고 있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실밥만 뽑으면 퇴원해서 재활전문병원에 입원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으로 판단했으나, 어쩌면 형님 재활은 재활전문병원까지는 가지 않아도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지금은 더 깊게 고민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실밥을 뽑아도 최소 일주일 이상은 입원을 유지하며 이곳에서 재활치료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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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형님의 병환과 수술에 대해 반응했던 것들을 조금 지나치다고(?) 보시는 분도 계실 겁니다.^^ 부모도 아니고 형제니까요.
근데 저희 삼 남매는 여느 삼 남매와 상황이 좀 다릅니다. 부모님이 저희 어릴 때 돌아가셨으니까요. 한 마디로 얘들끼리 컸거든요. 더욱이 형님은 저처럼 혼자입니다. 이 무슨 저주받은 집안인지.^^ 그러니 형님은 저에게 부모이기도 하고, 형제이기도 하고, 앞가림 제대로 못하는 자식 같기도 합니다.
아버님은 혼자서 피난 오셔서 친척이 전무합니다. 외가 친척이 서넛 있기는 하지만 부모님 돌아가신 후 왕래가 서서히 줄었고요. 마지막 연락도 30년도 넘었습니다. 누님은 조금 더 연락을 주고받은 친척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이유는 친척 중 한 분이 보험을 하는데, 누님에게 시험만 봐라, 시험만 보고 조금만 출근해도 수당이 나온다. 들들 볶이다 마지못해 시험을 보기도 했었죠. 그 이외에 친척과 연락을 주고받은 적은 없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몇 년 동안은 명절마다 찾아갔습니다. 저는 중학생, 누님과 형님은 고등학교 막 졸업하고 공장에서 일하던 무렵. 얘들이 무슨 돈이 있을까요. 그래도 식용유 선물 세트 사들고 갔습니다.
하지만 저는 세상을 너무 일찍 알아버렸습니다. 그들의 눈빛을 보았거든요. 행여 짐이 될까 봐 부담스러워하는 눈빛. 글쎄요. 저희는 어렸고 철이 없어서 도움을 받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실제 단 한 번도 도움을 받은 적이 없고요. 돈 없으면 식용유 사들고 가도 달갑지 않고 능력 있으면 내가 안 찾아가도 그들이 찾아오겠다는 걸 그 어린 나이에 알아버린 것이죠. 정말 몰랐어야 할 일이었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 친척 어른들 상당수는 돌아가셨을 테고 그들의 자식들은 저처럼 중년이 되었겠죠. 이제 길에서 만나도 알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저희 삼 남매는 여전히 세상에서 혼자입니다. 그런 형님이 안쓰럽고 마음 아픈 것이죠.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또 얼마나 되겠습니까. 시간이 지나면 또 생각이 달라지고 지금과는 다른 결정을 하게 될 수도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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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참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명제가 있죠. 우리 모두는 죽는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그리 먼 미래가 아니라는 것. 죽음은 곧 사라지는 것이죠. 흔적도 없이. 남는 것이라고는 기억 혹은 추억이죠. 그것도 살아있는 사람의 몫입니다.
걱정해 주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페북에 달린 댓글이 힘이 될 수 있다는 것 처음 알았습니다. 일일이 댓글에 다시 댓글을 달지는 않았지만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살면서 갚아야 할 짐이 점점 많아진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세상에는 여전히 착한 사람이 많습니다. 남의 고통을 진심으로 걱정해준다는 것. 쉬운 일은 아닐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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