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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이쓰 Jun 11. 2022

외롭지만 외롭지 않다

(feat. 나의 해방일지)


지난주 부산에 있는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나 다음 주에 제주도 여행 가는데 한번 만날 수 있어?"


나의 인간관계는 여러 갈래로 뻗어가는 물길보다는 한 줄기로 강하게 떨어지는 폭포수와 닮았다. 지극히 깊고 한정적이다. '내 사람'이라고 분류한 사람은 말 그대로 무조건 내 사람. 그리고 혼자만의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고 중요한 우리는 연락을 그리 자주 하지 않는다. 무소식이 희소식이겠거니 하며 가끔 안부를 전하고 언제든 만나면 어제도 얼굴을 본 사이처럼 그저 반갑다.


결혼 후 신혼여행을 다녀와 짧게 연락하고 이번에 연락을 했으니 2년 만이었다. 원래는 다른 친구와 함께 여행을 계획했는데 친구가 코로나19 확진이 되어 혼자 오게 되었다고 했다. 취소하려다 여러 가지 일로 심란해서 혼자서라도 가자고 마음먹으니 내가 떠올랐다고. 아무렴 좋았다. 부산에 가더라도 가족만 겨우 만나고 오니 (결혼 후엔 특히 더) 친구들을 만나기 힘든데, 제주에 있다면야 무조건 만나야지! 나는 제주 서쪽에 있고 평일이라 연차를 사용하기 어렵지만 저녁이라도 같이 먹자고 했다. 2박 3일 간 하루는 서귀포, 하루는 성산에서 묵는다고 했다. 내가 있는 곳으로 숙소를 바꾸고 싶은데 일주일 전이라 취소가 어렵다고 해서 난 정말 괜찮다고, 퇴근 후 차로 얼마든지 이동할 수 있다고 했다. '만난다'는 목표로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그녀는 돌연 미안하다고 했다. 이번 여행은 혼자 하고 싶다고.


내가 너무 눈치가 없었던 걸까. 약 한 시간 동안 무슨 이야기를 한 거지.

허무했다. 그리고 서운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출퇴근하는 내가 멀리까지 왔다 갔다 할 생각에 미안해진 걸까. 아니면 반갑게 연락은 했는데 이왕 혼자 여행 가는 거 제대로 해보자는 생각이 든 걸까. 설마 연차를 사용하기 어렵다는 말이 핑계로 들린 걸까. (하지만 엄마와 언니가 올 때도 세 번에 한번 겨우 쓰는데.) 연신 미안해하며 '혼자' 여행하고 싶다는 말을 단호하게 하니, 더 이상 물어볼 수 없었다. 안전하고 즐겁게 여행하라고, 오랜만에 전화해줘서 고맙다고 연락은 마무리지었지만, 마음은 마무리되지 않았다.


외롭고 헛헛해진 속을 털어놓고 싶었다. 남편에게 이야기하자 그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아쉬워하고 외로워하면서 왜 이곳에서 사람을 만나지 않느냐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서 친구도 만들었으면 좋겠는데 그럴 생각이 없어 보여서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다. 꼭 말이 통하지 않아도 가끔 만나 밥이나 먹고 올 수 있으면 좋지 않냐고.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야? 오래된 내 친구들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자주 못 보는 게 속상한 건데."

눈치 없는 눈물이 또 왈칵 쏟아져 말을 잇지 못했다. 나란 사람을 여전히 이해 못 하는 이에게 할 말도 없었다.


나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더라도 마음 맞는 이가 아니면 관계를 지속하는 것 자체가 힘들고 그런 관계를 원하지도 않는다. 속이 상하고 눈물이 난 이유는 가까이 있었으면 얼마든지 볼 수 있을 친구들을 보고 싶을 때 편히 볼 수 없다는 사실과 이런 나를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남편 때문이었다. 얼마 간의 시간이 흐르고 마음이 진정됐을 때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아주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라고, 그도 말이 심했다며 사과했지만 여전히 마음이 안 좋았다. 이야기를 꺼낸 내 잘못이고 제주도에 사는 내 잘못이라며 내 탓을 해버리기로 했다. 가끔은 나 자신도 이해하기 힘드니까. 그리고 얼굴을 붉히는 것보다 나를 탓하는 쪽이 쉬우니까.


6월 4일 토요일부터 6일 현충일까지 가고 싶은 곳도, 하고 싶은 것도 없어져 드라마나 한 편 정주행 하자며 <나의 해방일지>를 시청했다. 드라마 4회에서 사내 동호회에 가입하지 않았던 세 사람이 뜻을 모아 '해방 클럽'이라는 새로운 동호회를 만든다.

강령은 1. 행복한 척하지 않는다. 2. 불행한 척하지 않는다. 3. 정직하게 보겠다.

그리고 부칙은 1. 조언하지 않는다. 2. 위로하지 않는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의 첫 모임. 마주 보고 앉는 것도 스트레스여서 창가에 일렬로 앉아 각자의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었다.

"하... 엊그제 말이야. 진심으로 미안해."

"응? 갑자기?"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4회 중, 해방 클럽 첫 모임 장면_출처 jtbc 공식 홈페이지 명장면 클립


정말 나와 닮은 사람들이구나. 하는 찰나에 바로 위 장면을 보면서 그는, 본인이 너무 큰 상처를 준 것 같다며 진심으로 사과했다. 그제야 나도 구태여 말할 수 없던 것들이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이제는 괜찮아."

정말 괜찮았다. 언제나 좋기만 할 수 없다. 우리는 매일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또 서로를 보듬으며 살아가고 있으니까. 여전히 서로를 알아가며 조금씩 양보하고 상대방이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으며 앞으로 나아갈 거니까.

그리고 어쩌면 나는, 결혼으로 인해 남편의 고향인 제주에 정착하면서 그에게 더 큰 이해와 위로를 요구한 건지도 모른다. 나의 선택이었지, 그가 나에게 빚을 진 것은 아닌데.


어제저녁 친구는 홀로 여행을 마치고 부산으로 돌아갔다. 혼자 비행기를 타고 여행한 것은 처음이어서 외부의 모든 자극이 신선하고 즐거웠다며 다 내 덕분이라고 했다.

"내가 뭘 했다고?"

"혼자 여행할 기회를 줬잖아. 근데 사실 너 정말 보고 싶더라. 잠깐 외로웠는데 또 외롭지만은 않은 그런 기분 알지?"

"알다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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