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심한 사람이 용기 내는 법
새벽 다섯 시 반에 눈을 떴다. 후덥지근한 열기에 더워서 잠이 깬 것 같다. 눈을 뜨니 요의가 느껴져 화장실을 다녀오다가 한 가지 일이 머리에 스쳤다. 비몽사몽이었던 정신이 말짱해졌다.
'화환을 안 보냈다…!'
다름 아닌 회사 사장님 자제의 결혼식에 보냈어야 할 화환을 보내지 않았다. 결혼식은 어제(토요일) 오후였다. 하루만 일찍 생각이 났으면 좋았을 텐데. 아니다. 주중에 '나중에 해야지' 하고 미루지 말고 바로 주문 전화를 해야 했다. 시간은 얼마든지 있었다. 막연히 다음 주에, 또 다음 주에 하자고 미루다가 이 사달이 난 것이다.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첫째, 이실직고하고 사과한다. 좋게 넘어가면 정말 다행이고 한 소리를 듣는다 한들 당연한 결과이니 받아들여야 한다. 둘째, 그냥 모른 척한다. 명색이 사장인데 곳곳에서 화환이 밀려들지 않았겠는가. 설령 찾아봤다고 해도 정신이 없어서 못 봤겠거니 할 것이다. 셋째, 무언가 핑곗거리를 찾아서 내 잘못이 아닌 척하며 다른 것을 탓한다. 휴, 세 번째는 아무래도 비겁하다.
막장 드라마에 나오는 악역은 뻔히 드러날 일을 숨기느라 급급하다. 금방 풀 수 있는 끈을 스스로 꼬고 또 꼬아서 나중엔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알 수 없게 만든다. 악역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무조건 악행만 저지르지 않는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그냥 작정하고 못되게 구는 사람도 간혹 있지만 그들과는 별개로) 다들 잘해보려다 오해가 생기고 거짓말이 시작된다. 한번 시작된 거짓말은 부풀 대로 부풀어 도무지 걷잡을 수 없다. 그런 인물을 지켜보는 제삼자 입장에서는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다. '그냥 똑바로 얘기하지, 왜 시간을 끈담?', '지금이라도 바로잡아야 할 텐데, 저래봤자 끝이 뻔한 걸 모르나?'라며 나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닌 줄 알고 있었는데.
나라는 사람은 생각보다 비겁했나 보다. 나름대로 생각해낸 세 가지 수습 방법 중 첫 번째가 정답이라는 사실이 자명한데도 어떻게든 다른 방법으로 피해 가려고 궁리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머리로는 알지만, 자꾸만 외면하고 싶은 기분.
‘이렇게 글을 쓰고도 다른 생각을 하면 안 되지. 정말 안될까? 나는 왜 그랬을까. 차라리 다른 지인이거나 거래처였다면 곧바로 사과 전화를 했을 텐데, 고용주에게 이런 짓을 저질렀으니 더 미안하고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뒤통수치는 사람은 늘 가까이 있는 건가.’
답은 정해져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정말로 잊어버렸고 완전한 나의 잘못이며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말을 내 입으로 하는 것이 맞다. 내가 사장의 입장이라도 당장은 화가 나지만, 자기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하는 직원이라면 결국 괜찮다고 할 것이다. 솔직하게 상황을 설명하고 나의 실수를 드러내는 일에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지 이제 알았다. 누군가가 나에게 실수를 저지르고 그 사실을 인정하며 사과한다면, 앞으로의 나는 반드시 그의 용기를 크게 사고 마음으로 고마워할 것이다. 그러니까 더 이상 미루지 말고 말하자! 괜찮다고 넘기든 화를 내든, 겸허히 받아들이자! (차마 미루다가 못했다고는 말 못 하겠고, 대신 이미 처리해둔 줄 알았다고 하자;;)
사장님, 결혼식 잘 마치셨어요? ……. 죄송하다는 말씀드리려고요. 제가 지난주에 화환을 신청한 줄 알고 금요일에도 은행 갔다가 한 번 더 확인하려 했는데 깜빡했다가 이제 생각이 났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사장님 자제분 결혼식인데 너무 죄송합니다.
다행히 괜찮다고 넘기는 쪽이었다. 만약 본인에게 화환을 한다고 말했으면 사양했을 거라며, 어차피 다른 곳에서 넘칠 만큼 받았으니 정말 괜찮다고,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를 연신 말하고 전화를 끊은 뒤, 눈앞에 사장님의 호감도 그래프가 훌쩍 상승하는 것이 보였다. 새벽 다섯 시 반부터 지금 열 시 반까지 무려 다섯 시간이 걸렸다. 세 시간이 경과했을 때 얼른 전화하고 싶었지만, 너무 이른 시간이라 참고 온갖 궁리를 하다가 결국은 정석이라고 생각되는 방법을 선택했다. 별일도 아닌데 무슨 호들갑인가 싶은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손해를 볼지언정 남한테 싫은 소리 못하고, 길을 걷다 열 살 아이가 놀면서 소리를 질러도 깜짝 놀라 가슴이 두근거리는 나에게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별일이었다. 이제 홀가분해졌으니 못다 잔 잠을 다시 청해야겠다.